올여름도 더웠다. 남들을 위해 ‘집콕’ 하면서 읽은 소설로 허두를 뗄까 한다. 김기창의 소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을 집은 데에는 소설을 읽으며 더위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미리 말하면, 여기에 더위를 이겨낼 묘안이나 정신승리법 같은 건 없다. 이 소설은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소설로, 예민하고 침울한 상상력이 지배적이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의 상상력은 때로 현실 문제보다는 자존감이나 외로움 같은 보편적인 심성을 우화처럼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온난화로 인한 파국이라는, 상식적으로 짐작 가능한 결말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인즉, 온난화가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열기를 피할 거대 구조물인 ‘돔시티’로 만들었고, 돔시티 주민과 그곳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갈등한다는 줄거리이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도 있지만 돔시티를 파괴하려는 게릴라, 혹은 테러리스트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제목과는 달리 달달한 연애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연애는 과거의 기억에만 있을 뿐, 현실은 돔시티를 둘러싼 폭력적 대립만 존재한다. 온난화에 사랑마저 녹아버린 듯하다.
영화든 소설이든, 개인의 독자성은 중요한 주제였다. 취향이나 취미, 혹은 연애와 같은 대체 불가능한 감각과 감정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엄혹하든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의 영역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사랑이란 것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경험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로써 의미를 가지지 않는가. 그러니 이러한 미시적 독자성이란 세계 질서에 대응하는 의지의 발현이자 그 질서에 맞먹는 가치의 기원이다. 예술은 무모하거나 무의미해 보이지만 세상에 맞서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응원했고, 우리는 그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 관계도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약해진다. 세상과 맞설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면 개개인의 미세한 차이는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원효의 해골물처럼 현실을 깨달았을 때 과거의 가치는 증발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맨 먼저 와닿은 것이 이러한 현실감이었다. 온난화는 머지않아 사랑의 감정마저도 삼켜버리지 않을까 하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그때가 되면 세상없이 중요했던 독자성들, 예컨대 일상이나 예술의 세계에서 미세한 선택의 차이와 그로 인한 미묘한 변화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지구를 녹이는 열기 앞에서는 생존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재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아직까지는 대체 불가능한 독자성이 우리 삶의 원리로 남아 있다. 세상이 뭐라고 한들, 나대로 살 수 있을 때 함께 사는 세상의 가치는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세상 등지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도 밉지 않아 보인다. 내가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인도 그곳에서 똑같이 누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그나마 세상 살 만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온난화처럼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개인의 선택은 줄어든다. 온난화를 막기 위해 모두가 최대한으로 힘을 모아야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넘어가면 그땐 개미처럼 생존만을 추구하는 군집체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념에 이른 건 더위 탓이긴 하다. 덜 더웠으면 안 그랬을까 싶다. 그렇지만 개인의 선택으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분명 존재한다. 온난화가 와닿지 않으면 코로나를 보라. 마스크도 백신도 거부하는 삶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런다고 재난이 자신만 피해갈 리 없다. 사실 나도 온난화 같은 지구적 이슈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기상이변을 겪은 데다, 코로나도 한 몫 거들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가 되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동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야 남과 다른 정체성도 유지되고 사랑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오존층 파괴 이슈가 잠잠한 건 지난 수십 년간의 노력 덕분에 오존층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께 행동한다면 온난화의 해답도 찾을 것이다. 그땐 소설에서 시작한 우울도 더위와 함께 사라지길.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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