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가 지나면 가을배추를 심는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텃밭에 배추 모종을 50여 포기 심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할지 망설이고 있다.

배추 모종을 키워 김장하기까지는 손이 많이 간다. 식구가 둘 뿐이라 절인 배추를 몇 포기 사서 양념만 치대면 간단하게 큰일(?)을 치를 수 있다. 그런데다 요새는 굳이 김장을 할 필요가 없다. 겨울에도 마트에 가면 양배추나 무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다.

나는 배추김치보다 갓김치를 더 좋아한다. 알싸하면서 톡 쏘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폭염이 한창일 때 텃밭을 돌아보다가 가장자리에 파랗게 돋아난 싹을 보았다. 돌무더기 사이에서도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저게 뭘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갓이었다.

봄이 끝나갈 무렵, 텃밭 가에 서 있던 갓 줄기를 잘라 아무 데나 던져두었는데 그게 눈을 뜨고 나온 것이다. 비가 오래 내리지 않아 땅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했을 텐데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경이로운 광경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렇게 말 못하는 식물도 불볕더위를 참아내고 제 역할을 다 하는데 나는 덥다고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니! 죽비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갓은 양반들이 머리에 쓰던 갓과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채소 중에서는 줏대가 강하다. 밭가에 있어도 비굴한 자세를 보이지 않고 당당하다. 애써 심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씨까지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공들여 심고 가꾼 채소보다 야생에서 저 혼자 자란 갓, 민들레 엉겅퀴 질경이 왕고들빼기들이 약성은 더 좋다. 식물도 과보호하면 약해지고 저 혼자 내버려두면 강해지는 것이 아닐는지?

갓은 혈관과 호흡기를 튼튼하게 해주며 면역력 증강에 좋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한다면 꼭 챙겨먹어야 할 채소다. 갓이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고 해도 씨가 없으면 대를 이어갈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백담사 부근에 살고 있는 분한테서 중고 모터를 산 적이 있는데 택배 상자 안에 작은 봉지 하나가 덤으로 딸려왔다. 열어보니 갓 씨앗이었다. 별 생각 없이 배추 모종을 심고 남은 밭 귀퉁이에 뿌려두었는데 그 뒤부터는 해마다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처음에는 너무 맵싸해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덜 매운 겨자무 잎을 자주 먹다보니 차츰 적응이 되었고 이제는 갓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겨자무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준 격이다. 갓은 일부러 가꾸지 않아도 되니 편한데다 독특한 맛이라 애용하는 식재료가 되었다.

이른 봄 내내 갓 잎을 따 먹고 있으면 사람 키만큼 자라서 꽃을 피운다. 노란색 꽃은 이쁜데 꽃이 진 뒤에는 거추장스럽다.

지나갈 때마다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바람이 불어 쓰러지기라도 하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아내는 몇 번이나 베어내라고 다그쳤지만 씨가 여물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꼬투리가 누렇게 된 뒤에야 베어서 밭 주위에 던져두었더니 다시 와글와글 태어난 것이다.

나는 이걸 보고 깨달았다. 자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 할 일 안 하고 빈둥빈둥 놀거나 애를 먹이더라도 참고 기다려주면 언젠가는 사람 구실을 한다는 것을. 선생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학생보다는 반항하고 애 먹이거나 고집 센 사고뭉치들이 나중에는 더 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쨌거나 아직 배추를 심지도 않았는데 갓이 먼저 나왔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슬슬 불어오니 전어회를 사다가 갓잎을 뜯어 쌈을 싸 먹어야겠다.

고소한 전어회 맛도 좋지만 톡 쏘는 갓과 함께 싸 먹으면 한층 더 잘 어우러진다. 알고 보면 겨자도 갓 씨앗으로 만든 것이니 갓이 회와 궁합이 맞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