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몹시 불안하고 험악하다.
“역사적으로 코리아는 중국의 일부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플로리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을 때 한 말이다.
지극히 잘못된 역사 인식이고 우리 한국을 우습게 보는 엄청난 외교적 결례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제대로 항의 한번 안 하고 있다. 중국의 수·당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배구라는 전략가가 있었다. 그의 논리는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는 태양과 뭇별의 관계와 같기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인 패권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9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통화에서 한국을 향해 “옳고 그름을 파악해 편향된 장단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했다. 영국 G7(주요 7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출국 직전에 나왔다. 미국이 G7 회의에서 주도하게 될 반중(反中) 성토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우리 외교부는 왕이의 발언을 알리지도 않아 국민이 상황을 알지도 못하고 있다. 10일 중국 외교부 웹사이트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왕이는 전날 통화에서 정 장관에게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냉전적 사고에 가득 차 집단 대결을 선동하고 지역의 평화·안정·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 중국은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이어 “중한은 옳고 그름을 파악해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고 정치적 공감대를 지키되, 편향된 장단에 딸려가선 안 된다”고 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왕이의 발언은 아랫사람을 꾸중할 때 쓰는 훈계조의 표현이라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에 오간 말이 맞나 싶다”며 “한국을 말로만 전략적 동반자라 부르고 실제론 속국 대하듯 했다. 구한말 내정간섭을 일삼던 청나라 위안스카이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왕이 외교부장과 회담을 열었다. 우리 외교부 장관은 대부분 취임 후 미국 방문을 고위급 외교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전임 강경화 장관과 그 전임 윤병세 장관도 모두 취임 한 달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정 장관만 지난 2월 취임 이후 첫 해외 대면 외교 일정을 중국으로 잡았다.
회담 날짜도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2일)와 겹친다. 이는 미중 갈등 속에서 북중이 구축한 반미 연대를 깨기 위한 공동의 전략을 위한 모임으로 장소도 미국 메릴랜드주 해군사관학교이다. 한·미·일 협력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하려는 취지 분명하다. 중국이 초청한 장소도 미중 간에 전운이 감도는 대만 코앞의 푸젠성 샤먼이다. 미중 경쟁에서 중국 편에 서라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는데도, 정 장관은 순순히 샤먼행에 동의했다. 조선시대 ‘사대(事大) 외교’가 재연된 것 같다.
구한말 위안스카이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이 미국으로 떠날 때 ‘영약삼단’이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주재국에 가면 먼저 청국 공사관에 알린 뒤 청국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방문하고, 외교 모임에서는 청국 공사의 아랫자리에 앉고, 문제가 생기면 청국 공사와 합의 처리하라는 치욕적인 명령이었다. 박정양이 청국 공사를 배제하고 클리블랜드 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청하자 위안스카이는 처벌을 요구했다. 고종은 박정양을 국내로 소환했다.
우리 한국은 당당한 주권국가이다. 그런데 중국이 ‘사드 보복’이나 남중국해 문제 등에서 보듯이, 힘의 논리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행태를 내비치고 있다. 우리가 설사 중국 입장을 배려한다 해도 중국이 우리를 동등한 파트너로 대해 줄 것 같지도 않다. 현재 우리보다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은 호주와 대만, 유럽 국가들도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동참하는 추세다. 국제 판세를 읽고 미국의 다자동맹 네트워크에 편입돼 잠재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외교적 선택을 한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트럼프 외교를 인재 정책 절차가 없는 3무(無) 외교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도 닮은 꼴이다. 외세를 물리칠 힘이 부족하면 활용할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느 때보다 지도자의 혜안과 전문가의 식견에 터잡은 현명한 판단이 절실하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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