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주위에 항상 사람이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뀔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는 데 늘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단짝과 수업 시간을 뺀 모든 시간에 붙어 다녔습니다. 쉬는 시간, 학교길에도 언제나 함께였습니다. 제게 그 친구는 삶의 모범 답안 같았습니다.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성격탓에 친구를 많이, 빨리, 잘 사귀지 못해 새학기면 부담감과 조급함에 시달리는 나는 한심한 오답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의 나는 우리의 다름을, 나의 틀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우연히 동네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친구는 결혼적령기라 부르던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아 기르고 있었고 저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몇 년 내리 떨어진 미혼의 반백수였습니다. 다행이라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은 생겨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전에 네가 참 많이 부러웠어. 어디서나 잘 피는 꽃 같아서.”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나는 네가 부러웠는데. 홀로 서있어도 늘 푸른 소나무 같아서.” 우리는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고 친구는 홀로 있음이 두려워 관계맺음에 집착했던 시간의 고단함에 대해 털어 놓았습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결혼을 후회하는 건 아나지만 외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서둘렀던 것도 같아.”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홀로 있으면 외롭다 느끼는 걸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공식 해답은 한 쪽으로 밀어 놓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나를 아트만(참나)으로 구별하며 범아일여(우주와 나는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존재하는 소우주입니다. 하지만 대우주인 근원적 세계와 합일되기 이전의 나는 뭇별처럼 외로운 존재입니다. 불교의 견해는 이와 완전히 다릅니다. 무아(無我).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합니다. ‘나’가 있다고 말하는 중생에게 붓다가 되묻습니다. 네 마음이 너냐, 네 몸이 너냐, 네 생각이 너냐. 한순간이라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있느냐는 반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보살인가 봅니다. 내 안에 바람처럼 들고 나는 마음이 비단 외로움 뿐이겠느냐고. 친구가 옅게 웃습니다. 우리는 그저 브라만과 붓다 사이를 오가며 마음 공부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저도 가볍게 웃어 보입니다.

나는 나일 뿐, 나를 타자화시켜 바라보느라 공연히 진을 뺄 필요는 없습니다. 들려오는 나의 평판에 내 감정을 애써 소진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내 마음에서 자생한 감정이 잘 피고 잘 지도록 지켜보는 일만이 제 할 일이겠지요. 좋은 감정이 내 것이듯 불편한 감정 또한 나의 것이니 그 감정과 감정이 생겨난 외적 상태를 살펴보기만 해도 마음은 덜 부대낄테니까요.

친구는 항상 곁에 사람을 두려 애썼고 그래야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이 외롭지 않기를, 초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겁니다. 돌아보니 많은 관계가 몹시 이기적이고 소비적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노라고 말하고는 친구는 홀로 걸어갑니다.

이평 작가의 산문집 ‘관계를 정리하는 중입니다’를 읽었습니다. 보편적 감정을 살피는 작가의 세심한 사유와 잔잔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본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너를 꽃밭으로 데려가 줄 사람을 만나. 실제 꽃밭은 물론 너의 예쁜 얼굴에 웃음 함박꽃을 피워줄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작가가 예쁜 사랑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쓴 이 근사한 말을 좀 다르게 써서 친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를 꽃밭으로 데려갈 사람은 바로 너야.” 친구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말합니다. “좋아. 꽃밭에서 만나자.”

강이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