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법원이 어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는 1심 판결을 내리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4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개인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에 의해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 할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으로 사실상 원고가 패소한 셈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존중돼야 하지만 국민 법감정으로 볼 때 선뜻 납득하기 힘든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강제징용 피해자는 일본 기업들에 의해 일제강점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입었다며 2015년 5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한일 국민의 상대방 국가와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에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소송을 내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확정돼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로서는 법리와 국제적 파장 등을 고려한 판단일지 모르겠으나, 6년을 끌어온 소송의 당사자들로서는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2018년 10월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이 내린 판결과 정면배치된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징용 피해자 고 여운택씨 등 4명이 일본 기업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여씨 등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청구권 협정은 불법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 협정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이 협상 과정에서도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 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그 이유를 덧붙였다.

물론 하급심 재판부가 대법원 판례와 다른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 판결은 같은 취지의 소송을 통해 이미 13년 동안 1·2·3심과 파기환송심, 재상고심 등을 5차례의 재판을 거쳐 판례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2년 8개월만에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으니 논란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한국 법원이 맞느냐” 는 등 반발하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이유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강제징용 관련 소송이 현재 총 19건이나 진행되고 있다. 이번 판결이 1심인 만큼 국민적 관심이 큰 사안에 대해 상급심에선 진전된 판단이 내려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