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고양이 ‘고래’는 2007년생이다. 2학년 된 중학생 조카와 동갑이다. 요즘 청소년이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는지 모르지만 15세의 고래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안다. 250㎎캡슐에 든 약 한 알.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약을 들고 자신을 뒤쫓는 ‘나’다.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고양이 약 먹이는 법’을 공부해서 시도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답게 고래는 발톱을 세우고 반항하고, 나는 어르고 달래가며 약을 먹인다.

질풍노도라고 했지만 고양이 나이 15살은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76세 노인이다. 고래는 관절염으로 오른쪽 뒷다리를 약간 절고 구내염으로 피 섞인 침을 흘린다. 그래도 14살에 세상을 떠난 엄마, 여동생 고양이에 비하면 건강한 편이다.

내가 나타나면 고래는 긴장한다. 자다가 실눈을 떠서 경계하고, 몸단장 하다가도 곁눈질로 나를 살핀다. 혹시라도 나를 지나게 되면 재빠르게 달린다. 하지만 나는 실력 좋은 사냥꾼. 고래가 방심할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린다. 기회가 왔다고 요란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심장이 요동쳐도 약 먹이는 동작은 간결하고 정확하게(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내가 가까이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고래는 두발을 모으고 부탁하듯 애처롭게 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 가장 약한 자를 괴롭히는 악당이 된 것 같아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이고 좋아하는 간식을 준다. 방금 전까지 죽을 것처럼 굴던 고래. 먹기는 또 잘 먹는다. 찹찹, 거리며 먹다가 문득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서 나를 향해 운다. 오늘 약은 끝났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약 주는데 와 우노, 와?” 피식 웃음이 난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보지 못한지 1년 반이 흘렀다. 가족이 있어도 만나지 못하니 엄마 입장에서 보호자는 아무 소용없다. 엄마는 혼자 병과 싸우고 혼자 시간을 보낸다. 백신 1차접종도 혼자 맞으며 버텼다. 면회금지가 길어지자 병원에서 화상통화 시간을 마련해줬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화면 속의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는 엄마. 외부 자극에 반응 안하는 날이 더 많을 만큼 상태가 나빠졌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하지만 짧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떠들었다. ‘엄마’를 연신 외치면서 가족들의 근황을 알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힘내야한다. 조금만 기다려라’를 반복해서 말했다. 5분쯤 지났을까. 엄마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순수하게 나를 믿는다는 저 표정.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가족인데 와 웃노, 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저편의 간호사가 보고 듣는데도 나는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 종일 도망 다니던 고래도 내가 이불속에 들어가면 ‘골골송’을 부르며 품에 안긴다. 손을 핥아준다. 그렇게 무서워해놓고 나의 어떤 부분을 믿고 이렇게 다가오나. 나 좋은 사람 아니다, 믿지 마라. 도망 잘 가기로 소문난 내가 너의 순정에 붙들릴 순 없지. 고래를 슬쩍 밀어내고 엎드려버렸다. 그러자 고래가 내 등을 타고 기어오른다. 발톱을 세우고 등을 탄다. 따끔한 복수다. 올라와서도 고래는 마사지하듯 등을 누르는 ‘꾹꾹이’를 한다. 이 세상에 이렇게까지 나를 신뢰하는 이가 어디 있겠나. 발톱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딸을 향해 웃던 엄마의 눈빛도 따끔따끔 떠오른다. 내 어린 엄마 박영자 씨와 늙은 고양이 고래 씨가 날리는 ‘난 널 믿는다’는 뾰족한 모스부호.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친구의 연인을 사랑하는 주인공 화신이 친구에게 “믿지 마. 날 왜 믿어주고 그래. 내 마음대로 하게, 믿지 마, 좀.” 외치던 게 떠오른다. 날 왜 이렇게 믿어주나. 이런 마음은 따갑다 못해 쓰라린데. 그래도 천진한 아이처럼 말하는 엄마 안의 ‘큰 어른’과 늙고 아픈 고래 안의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렇담 등에서 피가 철철 나도 참을 수 있겠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겠다.

이정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