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 마치고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청진기를 어디에 두고 왔음을 알았다. 곧 각 병동에 연락하여 찾아달라고 했다. 간혹 있는 일이라 이번에도 누가 찾아 주리라 기대했는데,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환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로 질병을 진단하고자 청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다. 그는 자기의 귀를 환자의 가슴이나 등에 대어 체내의 음을 들었다. 청진기는 1816년경 프랑스 의사 라에네크가 창안했다. 처음엔 종이를 원통 모양으로 말아 한쪽 끝은 환자의 가슴에 대고 다른 쪽 끝은 자기의 귀에 댔다. 수년 후 그리스어로 ‘가슴’을 의미하는 스테토스(stethos)에서 이름을 따온 청진기(stethoscope)를 개발했다. 처음엔 나무로 만든 긴 관이었다. 후에 한쪽 귀로만 듣는 비교적 간단한 기구를 제작했다. 긴 고무관을 통해 양쪽 귀 모두를 사용하는 청진기는 1850년경에 등장했는데, 이것이 근대적인 청진기의 원형이 됐다.

그 후 청진기는 호흡기 및 심장 질환의 초기 진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돼 왔다. 내가 대학교수 시절에 실습 나온 학생들이 청진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온 병사 같다며 나무라기도 했다. 아무튼, “흉부 질환의 진찰에 청진기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라며 학생들에게 부지런히 청진법을 가르쳤다. 가슴의 적절한 부위에 청진기를 갖다 대라고, 들리는 소리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우선 분별하라고, 그리고 질병에 따른 소리의 특징을 잘 기억하라고 가르쳤다.

근년 들어 의사들의 청진기 사용이 차츰 줄어든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초음파 검사나 시티 검사 등으로 질병이 쉽게 진단되는 경우가 많아 구태여 청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머잖아 청진기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환자 진료 때 청진기 사용을 우선시한다. 요즘도 근무하는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대고 내부의 소리를 듣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이다. 맑은 호흡 소리나 규칙적인 심장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미소를 짓게 하지만, 쌕쌕거리는 소리나 불규칙하고 잡음이 섞인 소리는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그래도 이상 소견을 빨리 발견할 수 있어서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오래전부터 나는 귀에 잘 적응된 개인 청진기를 주로 사용하느라 공용 청진기를 별로 쓰지 않았다. 이번에 잃어버린 청진기는 제자 H가 선물한 것이다. 청진기를 쓸 때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25년여 전이다. 흉부외과에 여의사가 매우 드물던 시절에 그녀가 나를 찾아와 전공의 선발 시험에 응시한다고 했을 때, 수련 과정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며 만류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해내겠습니다!” 남자들만 북적이는 의국 생활도 힘들 거고, 밤잠을 설치는 일도 많을 거라며 거듭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우리 흉부외과 최초의 여의사가 됐다. 평소 딸 같은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때가 많았으나,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넨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호되게 훈련한 편이다. 어느덧 4년의 수련기가 끝날 무렵 그는 예정대로 큰 수술을 집도하게 됐다. 그때 그의 당찬 모습과 날렵한 손놀림을 지켜보고는 참 흐뭇했던 기억이 새롭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작은 축하 행사가 있었다. 집도했던 메스를 그에게 선물하며 마음껏 칭찬했다. 그는 훗날 타 병원의 과장으로 근무하며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꽃을 보내주더니, 정년 퇴임을 며칠 앞둔 날엔 청진기를 선물했다. “이번엔 웬 청진기를?” “교수님은 청진기를 많이 아끼시잖아요.” “고맙다, 자네 생각하며 잘 사용하마.”

이렇게 사연 깊은 청진기를 잃어버리다니! 청진기를 찾아서 온 병동을 뒤지기 시작했다. 동료 의사에게 내 청진기를 못 봤냐느고 물었더니, “그놈이 지쳐 도망간 것”이라며 농담을 했다. 그날 해가 지도록 찾고 있자니, 당직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원장님. 새로 하나 장만하세요. 오래된 것 같던데요.” 나는 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래되면 다 버리나, 물건 나름이지!”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밤새 자기가 찾아보겠다며 퇴근하라고 했다. 찾으면 문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소식이 없었다.

다음 날도 나는 청진기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잃어버린 것이 어디 청진기뿐인가 싶다. 먼 망각의 장(章)을 헤치며 지난날의 나를 소환하고 싶은 것이다. 프루스트는 “과거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가 언제든 사물을 통해 되살아난다”고 했다. 누군들 그날이 그립지 아니하랴.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들의 방문으로 잔뜩 붐벼야 할 병원에 적막감이 감돈다. 코로나19로 인해 돌연 잃어버린, 그저 평범했던, 그날들이 어찌 그립지 아니하리.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