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고 있다. 무르익는 봄은 공감각적이다. 목련이, 진달래가 금정산 초입에서 어서 오라고, 잘 가라고 손짓한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싱그럽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무르익는 봄을 만끽하는 건 청춘이다. 고당봉 정상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젊은 레깅스족은 예년과 달라진 풍경이다.

일제 암흑기, 젊은 두 시인은 봄을 서로 다르게 읊었다. 이상화는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일제가 짓누르는 이 땅에선 봄이 봄이 아니라고 절규했다. 그의 친구 이장희는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미주의적인 감각시의 세계를 개척했다. 꽃가루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봄의 향기가 어리고, 금방울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봄의 불길이 흐르고, 고양이의 입술에 봄 졸음이 떠돌고,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봄의 생기가 뛰논다고 했다. 고양이에게서 향기를 맡고, 불길을 보고, 생기를 느끼는 사이 봄의 한 가운데에 있다. 치밀한 관찰과 뛰어난 표현력이 빚은 요절 시인의 절창이다.

범어사 청련암에서 고당봉으로 향하다 ‘나 여기 있소’하며 고개를 내민 봄의 전령을 만났다. 골백번은 더 다녔을 산길이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다. 산거울꽃이다. 산거울은 잎이 가늘고 유연하다. 거울은 거웃을 잘못 표기한 것이란다. 거웃은 수염을 이른다. 그러고 보니 산거울은 생뚱맞고, 산거웃은 모양과 맞아떨어진다.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아 허옇거나 이제 연초록 빛을 띤 잎 위로 솟은 짧은 꽃대 위에 이삭 모양의 연노란색 꽃이 폈다. 길을 재촉하다간 자칫 놓치기 쉽다. 그만큼 조용히 피고 진다. 무심한 발길에 밟힐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산거울꽃의 꽃말이 ‘강인함’이다.

지난해 봄은 혹독했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의 공습은 우리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뭉치면 산다가 아니라 흩어져야 사는 위기였다.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백신을 10개월여 만에 개발해 겨우 숨통을 트고 있으나 상황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게다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는 국정을 뒤흔드는 블랙홀이 됐고, 성추문 탓에 치러지는 부산과 서울 시장 보궐선거로 봄을 다 보내게 생겼다.

발걸음을 늦추고 몸을 숙인 덕분에 가능한 산거울꽃과의 대면이었다. 늘 그 자리에서 꽃을 피웠을 산거울꽃이 살아남아야 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이 봄, 산에 갈 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봄을 느낄 일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 가능하다.

정상도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