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꿈속이었다. 엄마와 함께 길을 걷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밭에 다다랐다.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넓디넓은 밭에는 연분홍, 진분홍의 복사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창공에선 종달새가 노래하고, 땅에는 풀이 파릇파릇 돋아나 녹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았다. 밭둑 아래론 맑은 시냇물까지 흐르고 있어 우와!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이런 곳에 앉아 맘껏 소풍 놀이를 해봐야지, 하고 나는 발을 씻으러 냇가로 내려갔다. 하지만 물가로 내려서선 수심만 대강 확인하고 다시 둑으로 올라왔다. 그때까지 엄마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디에 앉으면 좋을까. 주변을 살피던 나는 먼 산들도 삥 둘러보았다. 한데 조금 전까지 여기서 한번 놀아봤으면 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저 높은 산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한테 “저 높은 산등성이를 더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돌아섰다가 말문이 콱 막혀 꿈에서 깨어났다. 하도 생생하여 눈가에 눈물이 흥건했다. 잠재의식 속에, 엄마를 한 번도 기쁘게 해주지 못했는데 꿈속에서도 즐거운 소풍 자리 한번 마련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비탄 때문이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사는 동안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구순을 바라보고 노환에 든 엄마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사나흘 뒤, 신내림 받은 보살 친구를 만난 김에 가시에 걸려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자식은 얼마나 돼먹지 못했으면 꿈속에서조차 즐거운 자리 한번 만들지 못하느냐고. 얘기를 다 들은 보살 친구가 손사래 쳤다. “아니다. 계속 가자고 한 게 맞다. 거기 자리 잡고 앉았으면 너나 네 엄마 중에 한 사람은 죽는다. 니는 아직 더 가야 한다”고 하질 않는가. 서글퍼서 내가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더. 앉을라치면 곧 죽음이거든.”

그 말을 들으니 전업 작가가 되기 전의 일이 생각났다. 광고기획사를 세 번이나 차렸다가 끝내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였다. 그즈음은 술도 곧잘 마시던 터라, 어쩌다 술 마신 뒤엔 노상 걸었다. 며칠이고 정처 없이. 그러다 우연히 주역학자가 쓴 책을 읽게 됐다. 다른 내용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 한마디는 뇌리에 꽂혔다. “걸어라. 걸으면 운명도 바뀌고 건강도 살아난다. 걸을 땐 무작정,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가능하면 쭉, 걷기만 하라.”

유명한 주역학자가 쓴 글이라서가 아니라, 그땐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도 걸어 다녔다. 돈이 없어 그랬거니와 시각장애로 운전을 하지 못해, 차를 가지고 돌아다닌 적은 아예 없었으므로. 그러다 소설을 쓰게 됐는데, 내 운명이 바뀌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고 엄마도 아흔 넘겨 살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 지도 1년 되어 가는 시점이다. 곳곳에서 어렵다고 야단인 지경에, 글로 먹고 사는 사람에겐 더 혹독한 시절이다. 평상적으로 경제가 돌아가도 문화예술인들의 삶은 어렵기 그지없는데, 장기간 걸친 재난에야 오죽하랴. 작년에는 작품집 하나 발간하지 못했음은 물론, 급기야는 무기력해져 새해에 들어섰음에도 한 달 넘게 숨만 쉬며 살아온 성싶다. 천성이 게으른 데다 글 쓸 의지와 힘마저 다 빠져버렸으니 원.

그래도 일어나 어쨌든 걸어야 한다. 걷는 데는 돈이 들지 않을뿐더러 굳이 동행이 없어도 되는 일이라, 코로나 팬데믹이 다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건 아닌지. 관점을 바꾸어서 보면 무작정 걷기가 바로 코로나의 면역강화책 아닐쏜가. 입춘도 지난 만큼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 마침 부산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인 긴급생계자금 명목으로 현금 50만 원을 지원해주는 고로, 새 신발이라도 사서 다시금 걸어보려 한다. 혹시 아는가. 주역학자 말대로 이제는 정말 내 운명이 바뀔지. 뭐 코로나만 무사히 이겨낸대도 그게 어딘가.

글쓰기도 걷기와 같다. 한번 무기력해지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한 문장도 나아가지질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지 못하거나 글쓰기를 중단한다면, 그게 바로 죽음이지 않겠는가. 코로나가 장기간 덮치더라도, 걷는 것처럼 어쨌든 써야 한다. 작가로 살려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