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방 책꽂이에는 능선이 고르지 않은 책들이 가득하다. 책 표지는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데다, 손을 대면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스러질 것만 같다. 책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도 만만찮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다던 ‘파피루스’가 생각난다.

‘알기쉬운 양자역학’ ‘천기누설’ ‘생명의 원기’ ‘대도(大道)에 이르는 서(書)’ ‘기과학(氣科學) TAO SCIENCE’ 등 책 제목에 호기심이 생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펼치는 순간 읽지도, 알지도 못하는, 결코 쉽지도 않은 한자들로 인해 눈앞이 캄캄해진다.

“ 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뒤늦은 후회와 함께 책을 덮고 만다. 이렇게 어려운 책들을 그는 어떻게 다 읽었을까 싶다. 그것도 평생을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 앉아 늘 책을 읽었던 그에게 ‘책만 보는 선비’라는 말은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그리 다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이었는데 백구두를 신고 스카프를 두른 채 오토바이를 타고 밖으로만 나도는 탓에 그는 아버지의 정이 뭔지도 몰랐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참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갈 때 어머니가 집에 있는 거울을 모조리 다 깨버렸다. 그의 유년 시절도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게다가 지금의 어머니가 친 어머니가 아니라는 소문이 사금파리처럼 퍼졌다. 훗날, 그는 낳아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산과 들로 다니며 홀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계신 상하이에 잦은 왕래를 했었고 상하이에서 돌아온 뒤 여자를 데리고 왔다. 미용사였던 여자가 너무 싫어 약 먹었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살아났다. 난봉꾼 아버지 덕에 절해고도(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같은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머리가 좋아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조명을 담당하는 팀이 시간에 맞추어 발전기를 주문해 놓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 일도 했다. 동양철학과 한의학을 스승도 없이 스스로 공부해서 깨우쳤다. 결혼하여 호떡 장사, 찐빵 장사를 하며 자식 넷을 키웠다.

수소문 끝에 세 살 적 떠난, 어머니 소식을 알게 됐지만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가 재혼해서 낳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끼워주고 오는 바람에 아내에게 혼쭐이 났다.

그는 6·25 전쟁에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참전유공자였다. 그는 여든일곱이었다. 여기까지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다.

빈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허투루 말 하지 않아야 됨을 배웠다. 평생 책을 읽는 모습에서 늘 책을 가까이해야 함을 배웠다. 명석함이 묻히는 것에 남들은 아쉬워했지만 웃기만 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행동에서 겸손함을 배웠다.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유년 시절 탓이었을까, 자식들을 살갑게 대하는 마음씨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보기 드문, 인간적으로,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의 방을 둘러본다. 그의 물건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아니, 그의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유품정리업체가 다녀간 걸 깜박했다. 이젠 군데군데 찢겨 나간 책도 없고 퀴퀴한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텅 빈 방이 그의 존재만큼이나 커 보인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한 편의 짧은 소설처럼 스쳐갔다.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내 가슴에 머무는 그가, 나의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