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시작되자마자 조금씩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이제는 전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코로나19의 위세가 만만치 않다. 그간 방역 모범국으로 자처했던 우리나라마저 3차 대유행의 혼란에 휩싸였다. 일상이 되어버린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조차 집단감염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않다. 날로 자라나는 사회적 공포심리는 개개인의 일상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언제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무기력과 절망 사이를 오간다. 정부의 질병관리 대처 능력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긴 하지만, 거리두기 단계에 따른 일상의 통제에 묵묵히 따르는 시민의 모습에서 공동체의 결속력을 확인하기도 한다.

지금 사회를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일상에서 최소한의 경제활동과 소통만으로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을 외면하지 않고 덥석 안아 올리는 구세주를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게 신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는 하루빨리 지금의 사태를 종결짓게 할 ‘무엇’을 기다린다. 이 기다림을 낳게 한 배경에는 비단 코로나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뿐만 아니라 더 오래된 질병이 깔려 있다. 맹신과 불신이다. 언뜻 반대 개념처럼 보이는 두 낱말은 한국 근현대사를 뿌리 깊게 끌고 온 집단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추종과 멸시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혼란한 사회상과 인간심리를 작가의 천재적인 시선으로 들여다 본 도스토옙스키 소설 ‘악령’의 등장인물들처럼, 언뜻 안정되고 체계적인 질서의 틀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군상들의 전쟁터인지 실감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에도 여러 인간성들이 티격태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은 그러한 모든 인간상(像)을 그러모은 최악의 존재다. 하지만 소설 속 현실에서는 멋지고 근사한 청년의 외모를 하고 있다. 허무주의와 무신론의 회오리가 엄습했던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서 작가는, 위대하게 보이는 존재가 지닌 죄의 뿌리를 탐험가처럼 샅샅이 발가벗긴다. 아무렇지도 않게 범죄를 저지르고, 윤리의식조차 없으며, 자신의 죄과에 대한 반성도 일체 하지 않는 자의 존재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악령’은 세대와 계층, 그리고 이념 사이의 갈등이 야기한 사회적 ‘사생아’였다. 한국사회가 오랜 질병처럼 곪을 대로 곪은 ‘이념’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수사에 아직도 매달리는 까닭은, 그것이 몸에서 떼버려야 할 혹부리가 아니라 근사한 보조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좌우, 금수저 흙수저, 세대와 계층 차별, 남녀차별 논쟁 등에서 사라지는 것은 포용과 이해요, 불거지는 것은 맹신과 불신이다. 그리고 맹신과 불신은 상대가 나를 제압해서 굴복시킬 수도 있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널리 퍼져 있는 피해의식은 한국처럼 이념 갈등 때문에 단기간에 전쟁과 내란, 혹은 혁명으로까지 점철되었던 한국현대사가 증명하듯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었던 것이다.

사회적 불안과 혼란 속에서도 참된 신념을 지니면서 공동체적 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개 집단과 조직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려는 듯 보이는 상대의 태도에 죽자 살자 덤비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오랜 ‘불투명한’ 불문법이요, 믿지 않는 것은 그 불문법을 들여다보며 비판하는 또 다른 집단이나 조직의 ‘투명한’ 불문법이다. 누가 옳으냐 누가 그르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누가 죽느냐 누가 사느냐의 문제로 나아갈 때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사실 신념을 이루게 된 계기나 동기를 살펴보면 사소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요소들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슨 대단한 계기라도 만나서 믿음의 기둥을 세우게 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신념은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이익 여부에 근거해 판단할 때 생기는 문제는 생각할 거리도 없이 부정적이다. 사람 개개인의 다양한 인성이 아닌, 사회 전체를 물들이는 집단감염의 포악한 실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발병의 증상은 뚜렷하지만 그 원인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시무시한 질병을 앓고 있지는 않는가.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무심히 자신이 유린한 어린 소녀의 자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았던 스타브로긴의 마음처럼, 우리는 상대가 자신에게 반드시 굴복해야만 한다는 헛된 신념의 병적 심리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또한 발길을 인도하는 손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안의 ‘맹신’과 ‘불신’을 털어버리는 연말이 되었으면 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