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가시 느티 오동/갈참 졸참 편백 측백//낯익은 이름들을/다정히 불러 줄 때//나무도 주름을 펴고/잎 그늘을 늘인다//이름 아래 수식 없이/아무개야 불러보면//희끗한 머리카락/깊게 새긴 주름에도//서늘히 가슴에 젖는/맑은 샘물 고인다” (전연희의 시조 ‘이름을 부르면’)

시인 선생님 언니 엄마 등의 수식을 빼고 내 이름을 불러본다. 이름이 주는 포근함과 다정함은 “○○야”라고 부를 때 다가온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손수건과 함께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다. 내 이름이 가슴에 뿌듯하게 달린 것도 잠시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교복 주머니 위에 자그마한 이름표를 달았다. 교문을 나서는 즉시 이름표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간혹 잊고 넣지 않은 날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곤 했다. 남학생들은 아예 교복 주머니 위에 이름표를 실로 기웠는데 여학생들은 이름표를 학교 안에서만 달았다. 그 감추고 다닌 이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나는 새 책의 첫 장에는 반드시 내 이름을 쓰는 버릇이 있다.

이제는 세미나나 정기총회 등 시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 이름표를 목걸이로 걸고 다닌다. 여덟 살 이후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내 이름표가 다시 가슴에 달리고 있다. 내 이름은 나와 함께 태어나서 자라고 또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한평생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중요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올해 구순이신 어머니는 40여 년 전에 이름을 바꾸셨다. 완강한 아버지 때문에 호적상으로 개명하지는 못하셨지만, 어머니는 바뀐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셨다. ‘누구 엄마’라고 불릴 때는 이름을 잊고 사셨는데 딸·아들의 청첩장에 당신의 이름을 새길 무렵 어머니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셨다. 자주 다니는 절의 스님께 좋은 이름을 받았다며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정작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 드릴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의 이름을 글씨로 쓸 기회도 거의 없었다.

몇 달 전 새로 낸 시조집에 어머니의 새 이름을 적어서 드렸더니 환히 미소 지으시며 당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셨다. 그 이름 속에서 어머니는 당신이 걸어오신 길을 반추하고 있었으리라. 이승 끝까지 안고 가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의 새 이름, 그 이름을 자주 불러드려야겠다.

어머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름은 그와 한평생을 함께 한다. 사람뿐만 아니다. 꽃과 나무의 이름도, 사물의 이름도, 도시와 나라와 기업의 이름도 한 번 정해지면 영원하다.

그런데 요즘 정당은 이름을 자주 바꾸어 기억을 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각오와 새 다짐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겉모습이 바뀐다고 속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처음 이름에 담았던 그 뜻대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어떨까? 그럼 그 이름에 대한 신뢰도만큼 지지와 응원이 쌓이지 않을까?

몇 년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공항을 잘못 찾아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아타튀르크공항으로 갔어야 했는데 이스탄불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놓쳤다. 이스탄불에 있으니 당연히 이스탄불공항이라고 생각했다. 김포, 인천, 김해, 제주공항 등 지명의 공항 이름에 익숙한 탓이다. 아타튀르크공항은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공항이다. 그러고 보니 정치가나 예술가, 과학자 등의 이름을 딴 공항이 많다. 인천공항도 건립 당시 세종공항으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공항뿐만 아니라 사람 이름을 딴 길도 있고 도시도 있으며 심지어 질병도 있다. 사회나 국가,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 많이 나와 그들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사물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름의 결정에는 신중함이 따라야 한다.

“자주 먼지 털고 소중히 닦아서/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어머닌 눈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상처 많은, 때 묻은, 이름의 비애여/천지에/너는 걸려서/거울처럼/나를/비춘다//” (이우걸의 시조 ‘이름’)

나를 비추는 거울인 이름, 내 존재의 상징인 이름, 그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소중히 닦는다. 때 묻은, 상처 많은 내 이름이 주름을 편다.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의 이름을 불러본다. 잊고 지낸 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정히 불러 줄 때 그들의 미소가 맑은 샘물로 고여 온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