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많이 드신 분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 은은한 감동을 준다. 나이 들어가는 분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진작부터 활동해오시던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100세를 넘어서도 강의를 하고, 저술 활동을 통해 원숙한 철학 향기를 세상에 보내고 있다. 의사 한원주 선생은 이달 초 향년 94세로 별세하기 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요양병원에서 헌신하셨다. 40여 년 전부터 의료선교의원을 운영하며 노숙자 의료봉사를 하신 이 ‘최고령 할머니’ 의사는 별세 직전까지도 매일 환자 10명 이상을 진료하셨다.
추석 연휴에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가황 나훈아는 수백 곡의 명곡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이자 최고의 보컬리스트이다. 70세가 넘은 그의 원숙하면서 나이를 초월한 무대는 가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차원이 달랐다. 지난날 느끼하다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그가 전한 메시지는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철학이 있는 어른의 그것이었다. “제가 (소크라)테스 형한테 ‘세상이 왜 이래’라고 물어보니, 테스 형도 ‘모른다’ 카네요. 세월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이왕 가는 거 끌려가면 안 돼요. 우리가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가야 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 끌려가는 거고, 안 하던 일을 해야 세월이 늦게 갑니다.”
오래전 몸이 부자유한 할머니가 매일 밤 길에 면한 창가에 등불을 비추며 조용히 앉아 있던 이야기가 기억에 있다. 어둠 속을 걷던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환한 등불이었다. 다른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할머니이지만, 조용히 빛을 비춰줌으로써 자신도 남을 위해 산다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인생 한복판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놓이게 된다. 지난날 친한 친구 같던 몸은 고약한 주인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신체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쭈그리고 앉아 세상을 모르고 원망이나 하며 늙어가는 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이전에 종사했던 분야에서, 과거에서 앞으로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재료를 찾아보도록 하자. 김형석 교수, 한원주 선생, 가황 나훈아 같은 분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던 분야에서 나름 노력해 인정받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 어른이 아무런 투자 없이 나이가 든다고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세상과 교류하며 나의 쓸모와 자존감을 확인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돈도 투자해야 한다. 꾸준히 투자해 일상에서 세컨드 라이프를 성실히 만들어 나갈 때 우리 삶도 잔잔한 감동과 선한 영향을 주는 어른의 인생이 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지은, 나이 들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한 ‘두 번째 산 The Second Mountain’이 출간됐다. 첫 번째 산을 오르는 삶에서는 자기 행복만을 성공한 삶으로 한다면, 두 번째 산을 오르는 삶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헌신의 삶을 의미한다.
나이가 많이 들면 아침에 일어나도 할 일을 찾지 못하게 된다. ‘두 번째 산’ 추천 글에 어느 분이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소개했다.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닌 타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보라.’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비춰주는 할머니의 생각이 바로 그렇다.
나이가 들어가면 노인은 인생의 가장자리에 놓이게 되지만, 한가운데서 보지 못한 온갖 것을 볼 수 있다. 70세가 넘은 노인인 필자가 스스로 다짐하면서 같은 또래 주위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구석을 지키면서 천리를 비추라(守一隅 照千里)’ ‘하나의 등불은 한구석을 비춘다(一燈照隅)’. 세월 속에 희로애락을 겪으며 쌓은 경험, 익힌 지식을 아깝게 세월에 흘려보내서는 아니 된다. 노인이 각자 하나의 등불을 밝혀 만 개의 등불이 돼 나라의 여러 구석을 비출 수 있도록 하자(萬燈照國). 마음속에 다짐하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해본다.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켜라. 의지하려 하지 말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자신을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 가야 할 곳을 분명하게 준비하는 노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생의 여유, 타인에 대한 돌봄·배려, 길을 헤쳐가는 개척자의 태도를 갖게 된다.
변호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