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때론 섬이 된다. 온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다. 점 점 점(…), 기약의 해체는 말줄임표 같은 침묵의 섬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돈다. 코로나 시대의 풍경이다. 출퇴근길, 회사 앞 지하도에서 매일 두 번 그 풍경의 일단을 본다. ‘○○○케익, 2020년 9월 9일 COMING SOON’. 9월 9일 개점한다던 빵집은 감감무소식이다. 굳게 내려진 셔터에 나붙은 홍보 포스터의 색이 바래고 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자영업의 폐업에선 “잘 살아 보겠다”는 약속이 산산조각 나 흩어진다. 코로나19는 이렇게 기약의 시간을 증발시킨다.
기약의 해체가 어디 이뿐인가. 코로나19는 “꼭 살아 남겠다”는 비정규직의 생존 약속을 더욱 위태롭게 한다.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올들어 비정규직의 실직 경험 비율은 31.3%로 정규직(4.3%)의 8배에 달한다. ‘퇴근하지 못하는’ 비정규직은 여전히 많다. 김용균 씨의 목숨을 앗아간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선 지난 10일 또 한 명의 비정규직이 숨졌다. 지난해에도 산업재해 사망자 2020명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었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지 못한,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 탓이다.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자동차도 만들지 말 것이며/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못도 만들지 말 것이며/바늘도 만들지 마라//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그 쇳물 쓰지 말고/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두게//가끔 엄마 찾아와/내 새끼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2010년 9월, 충남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20대 노동자가 전기로에 빠져 숨졌다. 1600도 넘는 쇳물이 지글지글 끓는 용광로여서 시신도 찾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네티즌이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가수 하림이 최근 이 시에 곡을 붙였고, 지난 14일 그 노래가 국회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에 의해 불려졌다. 안전관리 소홀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칠 경우 경영자와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현장에서다. 당진 노동자가 사망한지 10년이 지나고서야 그 사건이 국회에 진입한 셈이다.
하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전망은 어둡다. 국민의힘 의원의 다수가 기업 경영 위축을 이유로 반대하는 데다, 더불어민주당도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서다. 기약 없는 정치다. 비정규직의 기약 없는 삶은 이런 정치에서 연유한다. “사업장의 90%가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고 산안법 범죄 재범률이 97%라고 하는데, 여전히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은 고작 벌금 450만 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뿐이다.” 자본 이익을 노동자 목숨보다 중시하는 정치인에게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의 호소는 모기 소리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기약 없는 정치는 국민에게는 가혹하고 정치인에겐 관대하다. 공직자의 사익 추구를 막기 위한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에서 그 단면이 드러난다. 박덕흠 전 국민의힘 의원의 일가가 소유한 건설사들이 공공기관들로부터 수천억 원의 수입을 올린 사실이 문제로 불거지자, 여야는 한 목소리로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법안은 2013년 이미 발의됐으나 제정되지 않았다. 2015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제출한 김영란법 원안에도 이해충돌방지 조항이 들어있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무산시킨 바 있어서다.
기약 없는 정치는 국민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야기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고도가 누군지, 그가 언제 오는지 알지 못한 채 막연히 기다린다. 작품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드러낸 철학적 조명이지만, 2020년 한국 국민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생존의 문제다. 그래서 더 처절하고 더 실존적이다. “우리 당장 목이나 매자”는 작중 대사는 다수 국민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다.
올 추석에는 ‘코로나 이산’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아픔이 더욱 절절해졌다. ‘이슬은 오늘 밤부터 하얘지고/달은 고향에서 보던 밝은 달이라//아우 있어도 다 나뉘어 흩어지고/생사를 물을 집조차 없구나’. 759년 가을,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는 전란으로 헤어진 아우들을 그리워하며 시 ‘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다’를 썼다. 당시 두보 형제를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는 달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약 없는 세태 속에 기약을 해체하지 않는 건 달뿐이다. 달님이시여, 부디 높이높이 돋아 구석구석 민생의 쓰린 상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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