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견과 확산으로 심란하기만 한 올해도 어느덧 가을의 한복판에 접어들었다. 공포와 소문으로 무성한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중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던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내일은 나아지겠지’ 믿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마음을 누구나 간직한다. 내일에 대한 낙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은 그저 마지못해 숨 쉬는 고통의 무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과 절망은 쉽사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잦아드는가 싶다가도 다시 확산하는 바이러스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우리를 괴롭힌다. 실은 이런 게 삶이지 않느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많겠다. 따지고 보면 다양한 세계와 인생관이 모여 ‘지금 이곳’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숱한 지층이 서로 엮이고, 밀쳐내고, 끌어안는 가운데 생겨나는 세계의 표정을 생각해 본다. 또한 더는 이어나갈 거리가 없이 끊겼다고 믿었던 정황들이 다시금 머리를 치켜드는 것들을 생각한다. 공직자의 부정청탁 건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의혹 기사와 진작 없어져야 했을 구태들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을 본다. 이렇게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한숨을 쉬다가도 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이야기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다. 비록 육하원칙에 따른 정론이나 미끈하게 형식을 갖춘 스토리가 아닌,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깊숙하게 빠지게 되는 이야기의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람들은 이야기의 요소 가운데 사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누가 무엇을 했나’에 초점을 맞춘다. 사건의 주체와 사건의 이유와 사건 그 자체에 흥미와 관심을 보낸다. 그래서 사건을 이루게 된 어떤 정교하고 미세한 틈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이야기꾼 셰혜라자데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믿었고, 그래서 이야기가 주는 마력의 효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셰혜라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 청자가 술탄(임금)인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왕은 애초 하룻밤을 지내고 목숨을 앗을 예정이었지만, 다음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서 그럴 수 없다. 어떻게 이어질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상황이 벌어질지 왕뿐만 아니라 독자들마저 줄곧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이야기꾼의 육성에는 모르긴 해도 세계 전체가 담겨 있을 것이다.

나날이 쏟아지는 소식에 귀를 쫑긋 기울이면, 마치 지금의 우리는 풍랑 위를 위태롭게 항해하는 배 위에 있는 듯 느껴진다. 바이러스의 창궐이 이를 더욱 부추긴 감도 없지 않지만, 인생 자체가 위태로운 항해길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지만 내일 새롭게 닥칠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건 아마도, 아직 자신의 삶에 의미의 꼬리표를 달아야 한다는 무의식일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심리일 수도 있겠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이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이야말로 삶과 이야기를 맺고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드는 이야기 속을 헤집으면 세계가 얼마나 억측과 모순과 아이러니한 상황들로 가득 차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불합리한’ 상황일수록 사람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점이다. 왜 사람들은 ‘비일상적’이고, 통념이나 이성의 테두리에 벗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주는 것일까. 이야기가 평평하게 진행돼 사건이나 인물 성격 변화에 진폭이 없을 때 지루함을 느끼듯, 이 세계가 아무 변화도 없이 지금 이대로 시간의 잔등을 타고 잔잔히 흐르는 개울처럼 나아간다면 이 세계야말로 지옥이지 않을까. 물론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문제다.

사는 의미를 덧붙이기 위해서건, 뭔가 새로운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나 관심 때문이건 이야기가 남기는 흔적은 실로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는 무고한 존재가 어떻게 해서 누명을 쓰고 죽었는지에 대한 소재부터 이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소재까지를 아우른다. 그러니까 삶의 부조리함과 존재의 신성함에 이르기까지 실로 엄청난 스펙트럼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가능성이자 전제조건이 된다.

이야기에 빠져드는 사람은 대체로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방과 자신이 ‘지금 여기’에 함께 묶여 있다는 동류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끝이 없어야 하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사건이나 인물 전체를 둘러싼 이 세계의 무궁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뚜렷한 인과 관계보다도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반추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건 아닐까.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