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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칼럼] 가을의 시간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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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9-17 19:41:46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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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호는 노야(老野), 늙은 들판이다.” 이 문장은 화가 강요배 선생이 최근 펴낸 산문집에 실린 문장이다. 강요배 선생은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제주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왔고, 또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제주 4·3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늙은 들판이라니. 늙은 들판이라는 어휘는 옛 시간의 쌓임 그리고 광활함과 생명력, 바람의 길과도 같은 걸림이 없는 대자유 같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실로 강요배 선생의 그림에는 활동이, 흘러가는 움직임이 있다.
강요배 선생은 그림에 대해서도 이렇게 썼다. “‘그림’은 미술과 다르다. ‘그림’은 미술의 한 방식이고, 그것의 핵심적 부분이긴 하지만 더 특수하다. 그리고 싶어 하고, 또 그리는 행위에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스며 있다. 어느 정도 평평한 곳에 몸을 써서 마음을 나타내려는 의지가 있다. (……) ‘그림’은 미술로부터 뛰어오른다.”

강요배 선생의 그림에는 구름의 일어남이나 붉은 낙조의 번짐이 있다. 그리고 그림 속에 바람이 불어간다.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바람을 맞는 물과 돌과 땅거죽엔 시간이 각인된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물이 뒤집히고 눈발이 솟구치고 구름장이 찢긴다. 달과 별이 떨린다. 이 맵찬 바람 속의 풍경들 그리고 한차례 바람이 다 지나간 후 섬의 중심에 의연히 앉아 있는 새하얀 산, 한라산. 이것이 나에겐 참다운 풍경으로 비친다.” 강요배 선생의 이 글은 선생의 그림 속에서 바람이 자주 역동적으로 등장하는 그 까닭을 잘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선생의 그림을 통해 우리의 이 삶의 경험 또한 불어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것 또한 이해하게 된다. 바람처럼 불어오고 흩어지면서 우리에겐 경험이 집적되고 우리 존재 또한 바람의 문양이 각인된 하나의 물이요, 돌이요, 땅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곧 눈발이고 구름이고 달과 별이라는 것을, 혹은 그들과 자매이며 형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주에 와서 살다 보니 이 바람의 잦음과 그것이 어마어마한 세력임을 실감하게도 된다. 밭의 둘레에 바람을 막고자 키 큰 나무들을 심어 가꾸고, 지붕을 낮게 하고, 돌담을 쌓을 적에 돌과 돌 사이에 바람이 지나가는 바람구멍을 내는 것도 바람 때문일 것이다. 바람에 풀이 눕고, 바람에 물결이 높게 이는 풍경을 어디서나 매일 만날 수 있다. 이 바람은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옮겨 가서 움직임을, 현상을 만든다. 이 바람은 존재들에게 이동해 가서 그들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한다.

모든 존재가 현상으로 스스로를 증거함은 물론이다. 작고한 오규원 시인도 산문에서 이러한 점을 주목했다. “모든 존재가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고 할 때, 그리고 참된 의미에서 모든 존재의 그 현상이 그 ‘존재의 언어’라고 할 때, 그 언어는 시간의 생성과 함께 일어난다. 이 생성의 시간적 언어인 현상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언어’이며 동시에 굳어 있지 않은 의미로서의 이미지일 것이다”고 써서 존재를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드러내는 현상을 중요하게 보았다.

내가 즐겨 읽는 정지용 시인의 시 ‘조찬’에서도 움직이는 풍경을 포착하는 시인의 예리한 감각은 돋보인다. “햇살 피어/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길경(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리/ 촉 촉 죽순(竹筍) 돋듯.//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

1941년 발표된 이 시는 비가 내린 뒤 아침 풍경을 이동하는 것에 주목해 읽어내고 있다. 햇살은 다시 내리고, 골짜기를 옮기는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나고, 도라지 꽃봉오리는 맑게 씻겼다. 그리고 비가 내린 후라 물소리는 세차다. 이 시에서도 존재가 현상을 통해 말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산의 앞뒤로 달빛은 밝고/ 바다의 안팎으로 바람은 맑다/ 무엇이 진면목인가 묻는다면/ 하늘에 점 찍은 기러기/ 지나가는 데에 있다 하리” 이 시는 조선 전기 벽송선사의 작품이다. 달빛은 밝음으로 진리를 드러내고 바람은 맑음으로 진리를 드러내며 기러기는 날아가는 것 그 자체가 진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있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분별하는 마음과 곤란이 생겨나지 않는다.

가을을 맞아 위에 인용한 글들을 가까이 두고 고요히 생각한다. 장마와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풀벌레 소리가 더 애절해지고 하늘은 높아졌다. 그동안 자주 질문해보지 못했던, 모든 존재의 흘러감과 현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얼마 전 졸시 ‘그때에 나는’을 통해 이렇게 썼다.

“아가를 안으면 내 앞가슴에서 방울 소리가 났다 밭에 가 자두나무 아래에 홀로 서면 한 알의 잘 익은 자두가 되었다 마을로 돌아가려 언덕을 넘을 때에는 구르는 바퀴가 되었다 폭풍은 지나가며 하늘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너의 무거운 근심으로 나는 네가 되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조용한 저녁에는 나는 또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었다”

내가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일은 이익이 있다. 다른 존재의 속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존재가 나를 바라보는 입장을 알게 되어 나를 바로 보게도 된다. 생글생글 잘 웃는 아이를 품에 안으면 우리 내면에도 경쾌한 방울 소리가 일어날 것이다. 거둬들이는 과일을 보면 우리도 우리의 무르익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폭풍이 지나갈 때에는 하늘의 세계에 대해, 우주에 대해 큰 생각도 가져볼 것이다. 누군가의 근심이 곧 나의 근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며 살 일도 설계해보게 될 것이다.

독촉받는 마음으로 살지 않고 내 안쪽 마음과 바깥 세계를 두루 보면서 가을을 맞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올해 가을은 누구에게나 경황이 없고, 난감한 일이 어느 때보다 많겠지만 우리 삶의 한 영토에 가을이라는 시간의 여울이 흘러감을 잠시 느끼며 일상을 보냈으면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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