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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대추나무에 열린 그리움들 /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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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9-17 19:22:56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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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에서 밀양 시내로 이어지는 가로변은 대추밭 천지다. 대추는 밀양시 단장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 특산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대추를 재배했다는 명성에 걸맞게, 가지마다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지난 여름 유난히 길었던 장마에도,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온 산천을 할퀴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환경 조건과 토양이 대추나무가 생육하는 데 최적지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대추나무 자체가 장마는 물론 가뭄도 잘 견뎌내고, 과실은 작고 가지는 가시넝쿨처럼 탄력성을 지녀 바람에 잘 견디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매년 9월과 10월 사이 천황산에 올랐다가 버스를 타고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대추나무 이파리를 보고선 절로 아련함에 빠져든다. 에나멜로 코팅된 것처럼 반짝이는 이파리들의 투명한 그리움 속으로.

예닐곱 살 적 이맘때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외가엘 갔다. 외할아버지 제사가 그즈음이었기 때문이다. 함안의 삼봉산 기슭 ‘백세’라는 외가 동네 입구엔 대추나무 몇 그루가 길 따라 나란히 있었는데, 아직 공간 감각이나 지리적 인지력이 발달하지 못했던 나는 그 대추나무를 보고서야 외가에 다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저기 대추나무 보이제. 그라모 외갓집에 다 온 기다”고 주지시켜주었으므로. 한데 어린 마음에도 반짝이는 그 대추나무 이파리를 보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외가에 당도하는 시각이 으레 해 질 무렵이라, 석양의 햇빛을 받은 대추나무 이파리들의 반짝거림이 너무도 투명하였으니까. 그렇잖으면 아직은 대추가 덜 익어 군침이 돌지 않아 서러웠거나. 그 서러움은 성년이 되어서도 가시질 않아, 대추나무만 보면 그리움이 되어 가슴속을 파고드는데….

그 무렵 우리 집에도 둥치가 한아름되는 늙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10월 중순쯤 수확할 때 가마니에 한가득 딸 정도의 큰 나무가. 그럼에도 유독 외가 동네에 있는 그 대추나무에 서러움이 깃든 건 아마 다른 이유가 잠재되어 있어서지 싶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큰외숙모에겐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듣기로, 외숙모의 몸 고장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거기다 엄마는 형제 중에 막내여서 큰외숙모가 엄마에겐 친모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엄마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음에랴. 그래서인지 큰외숙모는 우리가 갈 때마다 콩이야 고구마야 아낌없이 내주는가 하면, 생질들을 친자식같이 잘 대해주셨다. 아버지 따라, 엄마 따라 제일 많이 드나들었던 나를 특별히.

그러나 ‘백세’라는 외가 동네 이름과는 딴판으로 아버지는 백세는커녕(음차일 뿐 동네 이름이 연세 의미는 아니지만) 반백도 못 넘기고 당신 나이 마흔여섯 때 세상을 떠났다. 위암으로 집에서 2년간 투병 생활하는 동안 내가 주로 곁을 지켰는데, 어린아이였음에도 이런 날이 올 줄 미리 알고 서글픔에 빠졌는지는 모르겠다. 당시로선 고학력 축에 드는 삼촌도 계셨고 당숙들도 네 분이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형들이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막 열 살 된 나에게 유언을 남기셨다. 땅마지기 문서 같은 것은 이미 남의 손으로 다 넘어간 뒤라 상속이랄 것도 없는 유언이었긴 하지만.

그 후로 심부름차 외가엘 오갈 때마다 그 대추나무를 보며 더욱 서러움에 잠기곤 했는데 하필이면! 벌써 몇 해가 지난 일이지만 큰외숙모도 추석 사흘 전에 돌아가셨으니, 그야말로 대추가 붉은색으로 익어갈 때 아니던가. 만일 예전같이 외가가 그 동네에 아직 그대로 있고, 내가 외할아버지와 큰외숙모 제사를 지내려 이맘때쯤 간다면, 에나멜로 코팅된 것처럼 반짝거리던 그 대추나무 이파리들이 어떻게 다가올지. 그보다, 대추나무들이 그 자리에 있기나 한지조차 까마득하게 돼버렸으니.

외가에 당도하였을 때의 시간대와 같이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는 지금, 차창 밖으로 연신 대추나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마다 아스라이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가, 큰외숙모 얼굴이 떠올랐다가. 저 대추나무들은 비록 재배된 것이긴 하나, 저 이파리들의 반짝거림이 그리움을 반사하는 건 예전의 그것과 다름없을 터. 어떤 사연으로, 누구의 가슴에 담길지는 몰라도. 그뿐이랴. 빨갛게 익은 대추의 달콤한 맛 또한 몸에 생기를 북돋워 주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한 달 후쯤 다시 들러 달콤한 대추 한 알로 아련한 그리움을 달래든 해야겠다. 장맛비를 맞고 태풍을 견디며 깨끗해진 대추나무 이파리들이 키워낸 것들이라, 과육은 단단하고 단맛 또한 풍부해지길 기대하며. 덧붙여, 오랜 기간 그리움과 애잔함에 메여온 내 인생 역시 그러해지길 바라면서 말이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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