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쓸 것이 없다. 아무리 황당한 주장이라도 머리 빳빳이 들고 큰 소리로 떠들면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세태라지만, 진솔한 자복(自服)에 담긴 설득력에 기대어 고백해 본다.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서 만나는 성격이 아닌 데다 감염병이 반년 넘게 창궐하는 상황이라 누구를 만나 새로운 것을 듣고 경험할 일이 완전히 없어졌다. 제대로 들은 것도 경험한 것도 없으니 쓸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쓸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감 전에 칼럼을 써야 하니 당연히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생각해보았다. 지금 우리가 전 지구적으로 직면한 위기? 그런데 코로나19에 대해서는 벌써 두 번이나 칼럼에서 다룬 바 있다. 인류세, 기후변화, 인도양 쌍극자, 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한반도를 끊임없이 강타하는 강력한 태풍 같은 현상은 내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관련 기사도 이미 많다.

내 전공? 고대 이집트의 의학 파피루스 어딘가에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는 처방전이 있다면 신이 나서 쓰겠지만,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이 신종 바이러스를 예측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정보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이 초고대 문명의 계승자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30세에 불과했다.)

여행기? 어느 광고의 카피 문구처럼 ‘처음으로 여행이 우리를 떠났’다. 거의 모든 하늘길과 국경이 막혀버려 갈 곳도 없었고 갈 마음도 내키지 않았다. 신변잡기? 떨어지는 벼락을 맞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이런 일은 드러낼 것이 아니라 숨길수록 좋다) 비극적인 참사에서 혼자 생존한 것도 아닌 이상(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조차 독자들에게는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겪어야 할 타인의 일일 뿐이다.

여름방학 동안 내가 이룬 학문적 성과? 내가 써야 하는 것은 칼럼이지 소설이 아니다. 그런 건 없다. 방학이라는 것이 원래 한 것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다는 것은 오래전에 경험으로 체득한 진리이다. 게다가 공인도 아닌 나의 사생활이나 학문적 성취 같은 것을 궁금해할 독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렇다고 스스로도 지키지 못할 조언이나 충고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환영받을만한 분위기도 아니다. 결국 앞서 고백한 것처럼 쓸 거리가 없다. 아니, 자발적인 고립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불가피한 방역조치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요즘, 독자가 충분히 공감하고 호응해줄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기의 탄생’이라는 책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세계를 파악하고 통제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선형적인 서사 구조로 구축하고 기억한다. 자기 전 오늘 하루 겪은 일을 정리해 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하루치 경험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아무리 지루하고 평범했다고 해도) 그 이야기에 담긴 내용은 실제로 내가 경험하고 행한 것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이야기에 포함되지 못한 수많은 사소한 경험과 사건은 금세 잊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로 구성된 경험이나 사건도 그것이 오랫동안 기억될 가치가 없는 한 어느새 망각 속에 묻히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는 대부분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색다르고 극적인 경험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전 생활로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방역 당국의 말을 실감하는 하루하루가 계속된다. 당연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과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강연과 글쓰기와 번역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더구나 2학기도 한동안은 비대면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서재와 도서관이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은 쓸거리, 즉 하고 싶은 이야기라 하겠다. 그래서 나는 입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생계수단마저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 내가 쓸거리를 잃어버리는 동안 그들은 먹거리를 잃게 생겼다. 내가 입이 무거워지는 동안 그들은 마음이, 아니 삶 전체가 무거워졌다. 잃어버린 것들에도 경중이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문득 깨닫는다. 이 사태 또한 지나가겠지만, 삶의 방편을 잃은 사람들의 신음을 듣는 것은 무참하다. 결국 입도 마음도 무거워지겠지만, 듣고 공감하는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