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5년 자신의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정보·자본·생각·사람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어 세상은 평평해졌다”고 했다. 또한 세계화가 국경 이동의 벽을 사라지게 하면서 물 흐르듯 자유로워진 인적·물적 왕래와 투자가 궁극적으로 전 세계 이익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국제관계에서의 ‘평평함’과 더불어 많은 국가는 국내적으로도 상당한 ‘평평함’을 누려왔다. 특히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일수록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갈등도 최소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기회의 평등이 강조됨에 따라 꽉 막혀있던 계층 간 이동의 벽도 차츰 무너져 내려 평평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미국 스탠포드대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헤겔과 마르크스주의 시대가 종식된 냉전 이후의 세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역사발전의 종착역에 도달함에 따라 이제는 대립 없는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최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평하기는커녕 점점 울퉁불퉁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우선 세계화가 일구어 내었다는 평평한 도로에 어느 순간부터 수많은 장애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어떤 곳에는 높은 벽이 등장하기까지 해 길이 막힌다. 자국 중심주의가 판을 치고, 이에 편승한 포퓰리즘 정치가 글로벌 협력을 좀 먹는 장애로 작용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물리적 벽을 쌓고 있다. 또한 미국 내의 일자리 창출과 제조업 회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해외에 진출한 자국기업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파격적인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편다. 예를 들어 최근 미국 정부는 중국과 인도 생산기지를 다시 미국으로 옮기는 조건으로 복제약 제조사 플로우(Phlow)와 8억1200만 달러의 재정지원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첨예한 대결구도 또한 점입가경이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서로 으르렁댄다. ‘세력 전이’의 시기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 이론이 실제 이루어 질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우리의 경우, 한일관계는 악화일로에 있고 양 국민 간 감정의 벽은 높아만 간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촌을 덮친 코로나19 대유행은 극단적 자국이기주의에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국경이 폐쇄되고 있는 사이 지구촌 구성원들 간에는 ‘마음의 벽’마저 들어서고 있다. 특히 외국인 혐오 현상이 눈에 부쩍 띈다. 저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헨리 키신저는 “세상이 다시 고립주의적 ‘성곽 도시 (walled city)’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국제관계 뿐 만 아니라 각국의 국내사정도 울퉁불퉁해지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지지파와 반 트럼프 진영 간의 반목이 나라를 두 쪽으로 쪼개놓았다. 최근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전역이 인종갈등을 겪었다. 노예제도와 관련한 과거사 논쟁도 심화하고 있다.

우리네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진영 간 편가르기가 도를 넘었다. 서로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있다. 내편은 무조건 ‘선’이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다. 대오 이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탈하면 그 순간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된다.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살벌하다. 소비하는 정보도 편향되어 있기 일쑤다.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생산한 정보만을 섭취하고, 이를 자기합리화의 위안으로 삼는다. 포털에 심어둔 알고리즘은 점점 더 자신만의 우물에 빠져들게 한다.

평평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극도의 자국중심주의와 과도한 ‘내편 네편’의 벽은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나 영향력 있는 호사가들이야 포퓰리즘을 앞세워 이러한 ‘벽의 세상’을 즐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이 무대에서 사라질 때 쯤 날아들게 될 엄청난 금액의 청구서는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다시 세상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높아만 가고 있는 각종 벽을 허물어버려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극단적인 자국중심주의로 흐르는 것을 견제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하다. 또한 지금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생각을 겸손히하고, 행동에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극히 일부 밖에 알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겸손과 자제, 열린 마음, 그리고 권력견제의 지성이 세상을 다시금 평평하게 만들 것이다.

동서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