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 저널리스트 팀 마샬이 쓴 ‘장벽의 시대’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 국가의 30% 이상에 해당하는, 적어도 65개 국이 국경선을 따라 장애물을 설치했다. 과거 장벽이 영토나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요즘은 주로 불법 이주민 차단과 같은 경제적 이유로 건설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장벽인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에 있는 4000㎞의 울타리나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처럼 말이다.

코로나19 시대에 세계는 새로운 장벽을 세우고 있다. ‘보건 안전’은 장벽을 세우는 새로운 명분이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산이 높아도 길은 있는 법, 인류는 새로운 길을 통해 장벽을 넘으려 한다. 길이 막히자 사람들은 줌(Zoom)이나 웨벡스(Webex) 등과 같은 온라인 화상회의 솔루션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비대면 수업으로, 직장인들은 재택근무와 화상회의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일상을 이어간다. 천천히 진행되던 초연결사회는 코로나19라는 촉매제를 만나 이제 급속히 우리 사회에 파고들었다. 물리적·시간적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초연결사회인 장벽 없는 사회(borderless society)가 성큼 다가선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

이제 부산 금융중심지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부산시는 2009년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이후 한때 국제금융센터지수(GFCI·Global Financial Center Index)를 24위까지 끌어올리며 한껏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2019년 46위, 올해 51위까지 추락했다(그나마 서울은 33위로 3계단 상승했다). 앞으로 극적으로 순위가 상승한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뚜렷한 모멘텀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금융중심지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실효성 있는 뒷받침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데서 찾는다. 세제 개혁과 같은 핵심적인 요소라든가 ‘금융특구청’ 신설과 같은 공격적인 조치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외국계 금융회사를 유치해서 금융중심지로 육성하겠다고 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지난 10여 년간 부산에 유치한 외국계 금융회사는 아직 전무하다. 인센티브가 없는데 굳이 부산까지 올 외국계 금융회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목표에만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최근 홍콩이 보안법 제정 여파로 혼란해지자 홍콩 소재 금융회사를 국내로 유치할 좋은 기회라는 식의 접근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브렉시트 이후 암스테르담이나 파리가 런던의 지위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런던은 지금도 금융중심지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홍콩도 비록 작년 3위에서 올해 6위로 GFCI 순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금융회사들이 실제로 소재지를 옮기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단기적인 목표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생각,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긴 호흡을 갖고 ‘매력 있는 도시, 부산’을 만들어 가야 한다. 도시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금융중심지로 육성하고 싶다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 부산이 가진 장벽을 걷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24시간 운영되는 국제공항 확보라든가 도로·교통여건 개선과 같은 인프라 확충이 선행되어야 한다. 의료시설의 확충,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교육 인프라 개선도 필요하다. 경제·사회 생활여건의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 부산의 매력도를 높여야 한다. 기업하기 좋고 살기 좋은 부산이 된다면 금융회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 것이다.

인프라 개선과 동시에 특화금융을 활성화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도 중요하다. 부산의 강점인 해양산업을 기반으로 해양금융을 발전시키는 특화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때마침 정부도 지난 5월 ‘제5차 금융중심지 기본계획안’을 의결하면서 지역별 특화전략에 따라 금융중심지를 내실있게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천명한 바 있다. 한국예탁결제원도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최고층인 63층을 지난해 12월에 매입해 이 중 521㎡(약 158평)를 외국계 금융회사 유치시 25년간 무상임대를 결정했다. 부산시도 이 공간에 입주할 외국계 금융회사에 5년간 법인세·소득세 감면 등 구체적인 혜택을 제시한 바 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K-Pop, K-Drama, 영화·게임산업(해마다 성황인 지스타를 보라) 등은 이미 한국을 매력적인 나라로 각인시키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장착된 ‘안전 한국’ 이미지는 덤이다. 부산에서만 즐길 수 있는 천혜의 해양관광자원은 특출난 차별화 포인트다. 문화-관광-실물경제-금융이 어우러져 약동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살기 좋은 곳이 되면 자연스럽게 길과 사람이 연결된다. 중심지란 결국 길과 사람이 연결되는 곳 아니겠는가.

한국예탁결제원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