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농부는 ‘자갈밭’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갈밭을 부단히 갈아 고랑을 내고 씨를 뿌린다. 자갈밭이 옥토가 되면 다시 씨를 뿌리고, 한그루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심는다.

지난 21일 별세한 경암(耕岩) 송금조 선생은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교육과 문화사업에 기부해 나눔정신의 표상이 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향년 98세. 당신이 심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든든한 희망이자 진정한 사랑이었다.

경암의 삶은 당신이 아낀 호처럼, ‘돌멩이를 걷어내며 자갈밭을 갈 듯이 살아온’ 부지런한 농부의 삶이었다. 사업 전선에 뛰어들어서도 소처럼 우직하게, 투철한 기업가 정신으로 묵정밭을 갈았다. 그리고 끝내 옥토로 만든 다음엔 흔쾌히 큰 나눔을 실천했다. 당신의 나눔정신은 지금 인재육성의 자양분, 교육 발전의 씨알로 자라고 있다.

경암은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분이다. 그는 2003년 대한민국 역사상 개인 기부로는 최대 액수인 305억 원을 부산대학교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나는 총장이 되기 전, 2013년 대외협력부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경암을 처음 만났다. 거금을 쾌척하신 분을 제대로 잘 모시지 못한 학교 구성원으로서 송구스러움이 깔려 있었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기부 당시 운동화 차림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그의 행동은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일반적인 기부와 달랐다.

경암에 대한 궁금증은 2015년 나온 자서전 ‘나는 여기까지 왔다’를 읽고 어느 정도 풀렸다. 일제강점기 부산 동래부에서 태어나 질곡의 근·현대사를 건너온 험난한 인생 역정.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드리려고 돈을 모으려 했던 어린 마음. 17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약품 도매상,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플라스틱 사출공장,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며 자갈밭을 일구었던 지난날. 책 속에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을 반복하면서도 정직하게 돈을 번 한 기업인의 고뇌와 기업가정신, 따뜻한 인간애가 오롯이 녹아 있다. ‘이런 분이었구나!’ 하고 깨닫자 존경심이 솟아나고 숙연해졌다. 그가 생각해온 교육의 꿈과 가치가 새삼 묵직했다. ‘한 분의 기업인이 세상을 바꾸는구나’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경암은 내게 기업인은, 교육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셨다.

경암이란 호는 그의 나이 쉰 줄에 요산 김정한 선생에게서 받은 것이라 한다. ‘돌과 자갈밭을 갈아 옥토를 일구듯 열심히 살라’. 1970년대 중반 요산과 인연을 맺은 경암은 어느 날 호를 받고 ‘이름값’을 하고자 더욱 힘껏 살았다는 고백도 하고 있다. 1984년 부산에서 요산문학상이 제정될 때 경암은 기꺼이 5000만 원 종잣돈을 기부했다.

경암은 2005년 사업을 통해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사재 1000억 원을 털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오래 꿈꿔온 교육철학의 구현이자 문화사업 실천이었다. 재단의 사업 중 하나인 경암학술상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시행되는 전국 최고 규모 학술상이다. 인문사회·자연과학·생명과학·공학 부문에서 크게 이바지한 사람에게 시상한다. 상금(각 2억 원)도 상금이지만, 권위도 인정받고 있다. 부산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많은 학자, 예술가들이 이 상을 받고 이름을 빛내면서 힘을 얻었다. 이들 수상자 가운데 노벨상을 받는 사람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부산대 양산캠퍼스는 전적으로 경암의 ‘통 큰 기부’ 덕분에 조성이 가능했다. 2003년 포화 상태의 부산대는 제2캠퍼스 건립을 위해 양산의 땅 약 112만4000㎡(34만 평) 매입을 계획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경암이 305억 원 기부를 약속하면서 부산대는 미래 도약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암은 우리 사회를 푸르게 일구는 ‘교육자’가 되셨다. 그는 만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음 생에는 명문가(名文家)가 되어 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인생은 무(無)다. 다 내놓고 빈손으로 간다!” 경암이 던진 화두는 이 나라 교육개혁·대학혁신의 불쏘시개가 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일구는 쟁기가 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전호환 부산대 교수·전 부산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