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동네 영화관에 들렀다. 코로나19 사태로 한참 조심해야 하는 시절이니만큼, 영화관 또한 드문드문 자리를 배정하는 듯했다. 최근 상영작 정보도 모른 상태에서 심신을 쉬게 할 요량으로 간 터라 러시아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리메이크한 SF 영화를 골랐다. ‘물’이 키워드인 영화였다.

대체로 SF로 치장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보여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 영화라는 기대감에서인지, 그간 보던 할리우드 풍과는 조금 색다른 느낌이었다. 외계 생명체의 지구 습격, 이 흔한 모티프의 영화인데도 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서로 죽이고 살리는 가운데 드라마틱한 줄거리가 진행되는 서사 구도도 뭔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는 영화산업이 대중의 선택을 받으며 활개를 치는 요인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인간 본성과 사회관계의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오랜 주제의식이 녹아있는 경우는 많다.

물을 숙주로 한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매개로 해서 지구를 접수하려는 스토리와 관계없이, ‘물’이 주는 상징과 이미지가 영상으로 재현되는 광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에서 오래전부터 다루어왔던 소재다.

물과 관련한 오래된 경구나 잠언이 많다. 고전에서 아마 물처럼 많이 인생살이의 비유로 쓰이는 소재도 드물 것이다. 그 가운데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공감이 되면서도 행하기는 어렵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라는 의미가 포함됐을진대, 요새 세상일을 보면 고개가 절레절레 움직인다.

산에 올라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심신을 추스르고 시원해지는 마음을 달래는 현대인이야 숱하다. 분주한 일상을 자연으로 달래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고전의 말씀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날마다 쏟아지는 온갖 사건사고나 질병 소식을 들으며, 역설적으로 ‘아직 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다가 이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존재들, 시민이고 평범한 이웃이요 친구요 형제자매들이 우리 주위에 있고 나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집밖에 나서면 뉴스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생태계 파괴나 인종 혐오나 차별의식에 따른 부적절한 행위 따위를 ‘양산’해내는 존재는 대개는 바로 평범한 ‘우리들’인 셈이다.

물은 낮게 흐르면서 낮은 존재를 샅샅이 훑으며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물의 생명체들을 먹이고 뭍의 생명들 또한 살찌게 한다. 물은 하늘로 증발되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시원한 빗줄기가 되어 이 세상을 적신다. 그리고 냇물이 되어 바다로 모인다.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물의 순환과 습성을 생각한다면, 우리와 다르다 해서 함부로 꺾거나 내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는 물을 소재로 한 고전 경구가 아직 살아남은 이유와도 관련이 깊다.

옛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옛사람 또한 지금 우리가 범하는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반복했음을 알 수 있다. ‘상선약수’ 같은 경구는 그런 세태를 꾸짖는 죽비 구실을 했을 것이다. 참된 말은 사람을 성가시게 할 때가 많다. 하지만 달콤한 말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너도나도 자기 말이 ‘참말’임을 내세운다. 그러면서 그 참말이 인생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영화는 주인공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외계 생명체가 몰고 온 거대한 물의 벙커를 폭파하고, 그렇게 찾아온 지구 평화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인이 살 길이 트였다는 메시지의 영화다. 누군가 살 길을 텄다. 우리는 말도 번지르르하게 잘하고 서로가 참말을 한다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실은 당사자 스스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가르쳐줘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은 ‘선량한’ 물과 같은 존재라 믿기 때문이다.

물길은 모든 선한 마음과 평화의 눈길과 상대방의 배려가 흐르는 시원한 관문이다. 한번 물길이 트이면 아무도 못 말린다. 뒤숭숭한 시절, 갑갑한 ‘격리’와 ‘거리두기’ 시스템이 빨리 끝났으면 한다. 아울러 ‘질병 시국’이자 물리적·정신적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뜬금없이, 시원하게 지구 생명을 위한 해답을 누군가가 ‘짠’ 하고 제시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바람일까.

지금 우리 모두는 바랄 것이다. 속히 예전의 날들로 돌아가기를, 아니 이제는 예전의 폭력적이고 고여 있었던 메커니즘을 망가뜨리고 우리 모두 진정으로 바랐던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힐 물길이 생기기를.

정훈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