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가까이 사회인야구를 하다 보니 기억에 남는 경기들이 제법 있다. 그중에서 유독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경기는 어느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던가, 일요일 야간에 치러진 시합이었다.

선수가 아닌 사회인으로서 조명탑에 불이 켜진 그라운드에 처음 선다는 설렘 때문이기도 했지만, 날도 날인지라 공교롭게 두 팀 모두 딱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최소의 인원만이 참석했기에 그 경기의 기억은 더욱 잊히지 않는다. 경기는 승패를 알 수 없이 시소를 타듯 이어졌고, 승리하려는 욕망이 본능적으로 더욱 달아올랐던 시간을 또한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 그때 그 경기장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뒤쪽으로 산이 자리한 야구 명문고의 운동장으로 어둠이 내려앉자 짙은 정적(靜寂)이 불현듯 온몸을 감쌌고, 수비를 나간 상대 팀 더그아웃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심판의 목소리만이 포수의 미트에 꽂히는 공의 울림처럼 일순 고요를 깰 뿐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만이 존재하는 듯, 깨끗한 안타를 쳐도 멋진 수비를 해도 이를 환호해 주는 이 없는 오로지 경기를 위해 기계적으로 뛰는 18명의 숨소리만 짐승처럼 푹푹 들려왔다.

“순간, 나를 구해줄 / 발걸음이 뚜벅뚜벅 / 몇 개의 불펜 투구로 경기를 조율하며 / 서슴없이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고 /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탄성은 / 홈으로 달려가며 / 환호하는 두 딸아이와 마주했다 / 그리고 그 뒤로는 / 내 생의 영원한 구원투수가 / 두 손 치켜들며 우뚝 서 있었다” (졸시 ‘아내2’ 중에서)

사회인야구를 시작할 무렵엔 아이들이 어렸고, 그래서 주말마다 나가는 아빠를 따라 아내와 함께 응원을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선수와 팀들도 마찬가지여서 늘 경기장은 북적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가족은 경기의 든든한 관중이 되어주었다. 서로 손뼉 치고 땀을 식혀 줄 음료수도 건네며 경기의 반전을 꾀할 따뜻한 격려로 선수들에게 종종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켜 주곤 하였다.

판소리에 추임새란 말이 있다. ‘추켜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은 창자(唱者)의 소리에 고수와 관객이 반응하며 더욱 흥을 불러일으켜 살판 나는 신명으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마치 경기에서 선수에게 더욱 힘을 내라고, 그래서 서로가 어울리며 함께 새판을 짜는, 어쩌면 이런 추임새의 역할을 야구에선 관중들 응원이 대신하지 않는가 한다. 흔히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라 불리는 사직 벌판, 상대 팀 투수가 1루 주자를 견제라도 하면 누가 신호라도 보낸 듯 “마”라는 구호가 일사불란하게 쇠미산 자락을 울리고, 파울볼이 관중석으로 떨어지면 지체 없이 “아 주라!”란 함성이 이어지는 곳, 더불어 부산 사람의 영원한 인생 노래인 ‘부산갈매기’가 거대한 떼창으로 이어지면 삽시간에 경기의 주인공은 관중으로 뒤바뀌는 이곳, 구도(球都) 부산은 진정한 응원 문화의 메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경기에 지고 있더라도 이런 용광로와 같은 관중이 만들어내는 서사(敍事)로 말미암아 선수들도 혼연일체가 되어 경기를 뒤집어버리는 그 멋진 장면이 수도 없이 연출되곤 하였다. 현재 국내 프로야구는 코로나19 여파로 무관중 경기로 진행되고 있다. 비어버린 관중석엔 팬들이 보낸 인형과 현수막 사진만이 덩그러니 자리할 뿐, 제 아무리 경기가 숨 멎을 듯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더라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경기의 중요한 매순간 관중이 한발 앞서 추임새를 넣으며 서로가 얼싸안고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생의 해방구로서의 그 몸짓들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김요아킴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