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 인사의 끝판이다.”(지난 6일 MBC 라디오 인터뷰) 박지원의 국가정보원장 깜짝 발탁에 대한 민주당 의원 윤건영의 촌평이다. ‘문재인 복심(腹心)’으로 불렸던 그의 말인 만큼 상당한 정치적 무게를 지닌다. 대통령 리더십의 의미 있는 변화를 예고한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그의 말을 듣고, 순간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권력의 조건’. 201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링컨’의 원작이다. 원제는 ‘Team of Rivals’. 그대로 옮기면, ‘라이벌로 이뤄진 팀’. 자신의 정적을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적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 링컨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했던 당내 라이벌을 대거 내각에 기용했다. 흑인노예 해방을 놓고 터진 미국 역사 최대 위기, 남북전쟁을 앞두고서 말이다. 국무, 재무, 법무장관 등 요직을 꿰찬 정적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링컨은 결국 승리한다.

2015년 2월 열린 당시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 당내 두 축인 주류 친문과 비주류 호남파가 강하게 부딪혔다. 대표 경선에 나선 박지원은 차기 대선 유력 주자 문재인의 당권 도전부터 딴지를 걸었다. 이른바 ‘대권-당권 분리론’. “꿩 먹고 알 먹고”식 계파 독식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586 운동권을 대표한 이인영도 가세했다. 양측을 패권과 지역주의로 매도하며 기득권 타파를 외쳤다. 질세라, 주류 측은 막판 ‘여론조사 합산 방식’ 변경으로 맞섰다. 파행 직전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3.5% 포인트 차이의 문재인 신승으로 끝났다. 후유증은 컸다. 이듬해 총선 직전, 호남계 비주류가 대거 탈당했다. 안철수와 손잡고 ‘국민의 당’을 만든 박지원은 문재인 공격 선봉을 자처했다.

그렇다면 5년 세월이 흘러 이제 한국판 ‘Team of Rivals’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당시 전당대회 1위 대통령, 2위 국정원장, 3위 통일부장관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다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박지원은 2000년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일궈낸 막후 주역. 그의 인맥과 정보력, 기획력이 주요 발탁 요인으로 꼽힌다. 직전 여당 원내대표 이인영 역시 정치적 비중과 과거 전대협 의장으로서 통일운동에 앞장선 이력이 한몫 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거론된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정치적 앙금을 뛰어넘은 ‘협치의 리더십’이 바로 그것. 실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남북관계는 파탄 직전으로 내몰린 상황. 정말 어렵게 잡은 한반도 평화 구도 정착 기회가 단번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위기 돌파를 위해 과거 불문, 인재 총동원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판 ‘Team of Rivals’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 해서 이를 맡기겠다.” 2017년 5월 10일 취임사를 통해 이미 국민에게 약속한 내용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대통령의 실천은 아직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지난 총선 압승 이후 보수 야당에 대한 여권의 전반적 기류가 이를 대변한다. 민주당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단독 원 구성에 이어 상임위원장까지 독식했다. 여기다 50년 만의 3차 추경, 그것도 35조 원이 넘는 사상 최대 예산을 혼자서 처리해 버렸다.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법. 미래통합당의 ‘정치적 몽니’에 대한 원칙적 대응, 속도가 생명인 추경의 시급성 등을 볼멘 목소리로 내뱉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몰고 온 전대미문의 경제적 위기 상황, 어디로 튈지 아직 감조차 잡기 힘든 북한 변수, 공수처와 검찰개혁을 놓고 재연된 진영 간 극한 대립까지. 국가 전반에 경고등이 울리고 있다. 진정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라이벌로 이뤄진 팀’을 만들 요량이라면 진영을 달리해온 진짜 정적을 품어야 한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공화당 내 라이벌을 넘어 민주당 정적까지 전쟁장관, 해군장관, 우정장관으로 기용하며 진정한 ‘Team of Rivals’를 완성했다. 역자는 이를 성공하기 위한 ‘권력의 조건’으로 본 듯 한국판 제목으로 채택했다. 권력의 성공 방정식은 동서고금을 통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