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의 충격적인 기자회견 이래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에서는 피해자인 할머니들을 이용해서 좌파 운동권 세력이 돈벌이를 해왔다고 비난하는 반면, 반대편에서는 친일 우익 세력이 할머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단 할머니의 순수한 문제제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평소 할머니들께 눈길도 안 주던 세력이 갑작스레 할머니를 염려하는 듯 법석 떠는 태도가 흉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어떤 나쁜 배후로부터 할머니가 사주를 받았다는 식의 비판도 적절치 않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을수록 정의연은 자가당착에 빠진다. 할머니들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거짓뿐이라 우기는 일본 우익에 맞서 할머니들의 절규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이 단체의 설립 취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그동안 할머니들의 아픔을 이용만 해왔다는 당사자 할머니의 비판은 참으로 뼈아픈 것이다. 물론 적어도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정의연의 오랜 노력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국민의 성금을 횡령했다고? 그런 의혹을 주되게 제기하는 세력의 면면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활동가들의 진정성과는 별개로 당사자인 할머니가 스스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오랜 활동경력과 연령을 생각할 때 그분이 눈앞 이익에 어두워 끝내 일을 벌였다고 말하는 건 악마의 농담일 것이다. 할머니 의견이 위안부 피해자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적절치 않다. 그건 아주 나쁜 이간질이다. 할머니의 분노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제기한 문제 중 일부 사실적 오류가 있다 해도, 실로 부차적이다. 일본 우익은 늘 사실적 오류를 추려 할머니들의 기억을 부정해왔다. 우리가 할머니를 진정 존중한다면 그 잘난 팩트체크에 열 올리지 말고 피해 당사자가 분노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할머니는 공개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 악마가 아니고서는, 할머니가 몇 푼 더 달라고 투정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후한 성금을 다른 사업에는 쓰지 말고 오직 당신들에게만 쓰라는 뜻이 아님도 분명하다. 할머니는 오히려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분 회견 요지는 피해 당사자와 당사자 문제의 해결이 모든 사업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이 운동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관련 활동가들의 진정성이나 능력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와 활동가의 괴리는 지난 수십 년 간 이 땅 인권운동 진영에서 수없이 반복된 고질병이다. 어떤 피해 상황이든 당사자 혼자 문제를 해결해가기는 힘들다. 피해 규모가 클수록 사회적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간 각종 국가폭력의 피해자, 장애인, 성 소수자, 원폭피해자, 세월호 피해자, 건강권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에게는 정말로 든든한 ‘배후세력(?)’이 절실했다. 물론 어떠한 인권회복운동이든 당사자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원칙이지만, 당사자가 그만한 능력과 진정성을 꼭 지니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게 문제다. 여기서 늘 괴리가 생긴다. 당사자들은 사회적 연대세력에 비해 눈앞의 유혹에 더 취약하고, 어려운 일을 추진해갈 만 한 행정적 능력과 정치적 안목이 부족하기 쉽다.
원칙적으로 보면 이런 당사자들이 힘겨운 운동 과정을 통해 어엿한 활동가로 성장하도록 고무하고 기다려야 옳겠지만, 어려운 싸움 현장에서 이런 교과서적 원칙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당사자는 마스코트의 신세로 전락한 채 몇몇 명망가의 화려한 독무대가 펼쳐지곤 한다. 그렇지만 인권운동은 모금 액수, 언론 노출도, 정치적 의제화나 입법화 등 성과만으로 올곧게 평가될 수 없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가치의 영역이지 실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는 본인에게나 분노의 대상이 된 활동가들에게, 나아가 우리 사회 개혁세력 전체에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스스로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칭하셨다. 할머니는 당당히 자기주장을 펼치셨다. 어쩌면 늘 사회적 약자였던 할머니들이 응당한 권리를 자각하고 되찾는 일이야말로 정의연 활동의 궁극 목표가 아닌가. 피해 당사자가 금단의 성역에 갇히지 않고 활동가 동료로 인정받는다면, 진로를 바꾸는 데 앞장설 수도, 사안에 따라 비판받을 수도 있다. 아무쪼록 이 땅의 위안부 피해자 인권운동이 할머니의 문제제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악의 세력에 주눅 들지 않고 당사자들과 힘을 합쳐 더 큰 걸음을 걸어가길 바란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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