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상태가 지속되는 중에도 명백한 것이 있다. 우리가 혼란의 한복판에 있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어둠과 빛을 가려내고, 어둠을 지나 빛의 영역에 다다라야 한다는 의지를 만들어낸다. 개인 차원의 혼란이든 공동체 차원의 혼란이든 마찬가지다. 혼돈과 무지와 갈등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기에, 음울한 실존주의자라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전쟁이 불러일으킨 재앙이나 환멸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허무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낭만주의가 싹튼다. 모든 걸 시간이라는 이름으로만 낙관적으로 돌리려는 느긋한 인생관을 지닌 사람조차 일말의 불안이 없지 않다. 잘나고 행복한 사람도, 불행하고 못난 사람도 멀리서 보면 꿈틀거리며 조금씩 생명의 끈을 이으려는 미약한 생명체다. 그런데 우리 슬픈 인간은 축적되고 내면화된 잣대와 가늠자로 세상을 판단한다. 일이 생기면 네 탓이니 내 탓이니 싸운다. 각자, 아니면 집단으로 형성된 편견이 사람을 판단하고 사회를 규정 짓고 세계를 질서 지운다.
‘진보’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서 마련된 의식의 지평에서 생겨났다. 지금 우리 사회와 세계가 수천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이야 그쪽으로 기우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예전 사람들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엇이 맞고 틀리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자는 게 아니다. 진보나 보수의 프레임을 씌우면 왠지 세상만물에 대해 옳고 그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도 저마다 겪은 체험에서 비롯된 어긋난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가 안겨준 선물이다. 프레임에 한 번 갇히면 여간해서는 빠져나오기 힘들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논리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전 세계를 경악과 절망에 빠트린 코로나19나, 북쪽 지도자의 생사 여부를 두고 분분했던 온갖 억측을 생각한다. 전염병은 실재고 북쪽의 지도자에 대한 ‘구구절절’은 상상이나 소설에 불과했다. 뒤집어 생각해보자. 지금도 진행 중인 전염병은 인류 전멸의 공상과학소설로 나아갈 수 있고 북쪽 지도자의 경우 상상 속에서 부풀려졌지만 마치 실재처럼 긴장된 한반도 정세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과 추측은 뒤섞이게 마련이다. 수많은 사람은 이러한 사실과 추측이 안겨다 주는 공포와 설렘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시시각각 느끼며 살아간다. 잡담처럼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며 웃고 흐느끼며 살아가는 게 인류의 삶이었다.
더러 목숨까지도 바칠 듯이 혈안이 되어 덤벼드는 사람과 공동체와 나라를 본다. 어떤 사안을 두고 자잘못을 따지는 일이나, 좀 더 나은 일의 진행을 위해 악착 같이 달려드는 경우를 목격한다. 알고 보면 자신이 만든 프레임과 고정관념에 철저히 복무하는 경우일수록 더욱 투철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공평무사’란 말은 지적 놀음에만 해당되는 말처럼, 곧장 휴지통으로 내던져버린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렇다고 수긍하기에는 세상에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추태가 속출한다.
“먼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구절이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게 대체로 무난하고 스스로도 ‘옳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추세나 흐름을 따르는 게 대부분의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할 때, ‘아니오’라 답할 수 있는 세상은 언제나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지탄받고 때로 모멸감을 받으면서 스러져갔다.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웃의 느낌과 행동과 말에 곧잘 스며드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자신이 서 있고 생각하는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반성할 거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시시각각 판단하고 행할 때는 정답이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진실의 영토에 합류해 올바르게 행동하고 말하는가는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 어슴푸레 알게 될 것이다.
안개처럼 뒤죽박죽 헝클어진 시기다. 우리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자신과 용기가 있다면 조그만 실마리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 힘든 시절일수록 계기가 주어짐을 우리 인류는 체득해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류와 판단 착오의 연속의 역사였지만, 그만큼 쌓인 지혜와 슬기 또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겨울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건 계절이 아니다. 지금 움트고 있는 봄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있는 자만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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