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주 전과 비교해도 거리에는 확연 생기가 돈다. 연일 치솟는 TV 화면의 숫자 따라 활짝 핀 벚꽃만 그늘져 오히려 섬뜩했던 골목도 예전만 하다 싶어졌고, 마주 지나며 미처 맞추지 못한 서늘하고 멀찍한 눈초리도 예민한 불안과 의심을 거둬들인 듯하다.

장을 보러 자주 다니는 대형 상점엔 인파라고 해도 좋을 만큼, 2ｍ는커녕 한 자만큼도 안 되는 거리가 꺼림칙할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이처럼 비비적대도 괜찮겠거니, 급하지 않은 일은 미루고 꼭 필요한 일만 하라는 근신의 나날과 성급한 행렬은 벌써 거리가 멀었다.

아직 치료제도 백신도 없다. 아직 정점은 멀었다. 아직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아직 개학은 시기상조다. 아직 경계를 풀 때가 아니다. 끊임없이 아직을 되뇌어주는 쪽과 그대로 받아 되뇌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뤄진 미연의 여백은 초유의 지각 개학, 초유의 재난지원금, 초유의, 초유의, 이어지는 초유가 메웠다. 이런 때를 맞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던 얼굴의 묵은 때를 씻듯 여태 겪고 있는 불온한 세월을 이참에 자각하고 고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현대 미국 정가와 외교가의 원로 가운데 헨리 키신저가 있다. 짙은 뿔테 안경을 쓴 그가 마오쩌둥 왼쪽에 앉은 흑백사진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다. 중국에 관한 회고를 담은 그의 두꺼운 책도 몇 년 전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시대나 처지가 나와 천양지차이고, 마뜩지 않은 일을 처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실 전달과 예리한 판단력은 과연 노대가답다고 탄복했었다. 백 살 가까운 나이를 먹고도 현안에 대해 활발히 의견을 제시하는 그가 4월 초 월스트리트저널에 짤막한 기고문을 실었다.

미국에서도 전염병 유행이 뚜렷하던 시점에 이를 중대하게 보고 있다는 티가 역력했다. 국내 언론도 ‘코로나의 대유행은 세계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그대로 전했다.

흥미로운 제목이었으나 발췌한 보도만으로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읽은 기고문의 느낌은 발췌문과 좀 달랐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연설문, 특히 전쟁을 앞둔 격문처럼 비장함과 당당함은 당연한 미덕이라 할 수 있겠으나, 자신이 직접 참전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지 전투를 수미쌍관 언급한 데서 서사시의 풍격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서사시가 담을 수밖에 없는 상당한 문명사적 전망도 우리나라 정치 비평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어서 일단 좋았다.

글머리에서 벌지 전투를 언급한 키신저는 세계대전의 폐허를 복구하고 동맹국을 통해 냉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서유럽에 대규모 원조를 시행했던 마셜 플랜과 전쟁 기간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교훈을 우선 언급한다. 이것이 완전히 바뀐 세계를 미국이 여전히 쥐고 흔들려 할 때 필요한 대원칙이겠다. 이어서 그는 현재 당면한 3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전염병에 대한 글로벌 회복력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세계 경제의 상처를 치유하도록 분투해야 한다. 셋째, 자유세계 질서의 원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첫째가 당면한 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과제, 둘째는 미연의 경제적 과제, 셋째는 그보다 먼 미래의 정치적 과제다. 첫째 과제에는 이의가 없지만 둘째와 셋째 과제는 미국인이 아니라서 썩 내키지 않았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현대적 가치 또는 문명사적 전망을 밝힌다. ‘국가기관이 재난을 예측하고 충격을 막고 안정을 복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국가 번영의 토대’라는 파악이나 ‘글로벌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을 기초로 번영하는 시대에 다시 시대착오적인 성곽 시대(중세)의 사고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경고나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는 계몽주의적 가치를 방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호소까지. ‘현대 문명의 가치가 유럽 세계 주도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규칙이다’는 삐딱한 시각에서 보면 흔쾌히 호응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비록 보건 위기가 일시적일 테고 그러길 바라지만, 보건 위기가 촉발한 정치·경제의 격변은 여러 세대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을 포함한 어떤 국가도 순수하게 일국의 노력만으로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으니 협력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나 ‘(미국) 사회의 내적 연대, (세계) 여러 사회 간의 연대, 국제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 대중의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발성을 역설한 것은 들을 만한 말이었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은 여유를 찾기 위한 위안이다. 인도, 아프리카, 남미 대륙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과 전염병이 몰고 온 실업의 이중고가 이미 세계인을 더한 고통 속으로 휘몰아 넣은 참이다. 그들이 느낄 공포에 비하면 우리 살림살이의 불안은 사치인가 싶으니 현자 헨리의 말처럼 국내외에서 연대의 길을 찾아보는 것이 옳겠다.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