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바이러스에 의한 집단 폐렴이 처음 보고됐다. 당시 원인조차 알지 못했던 신종 RNA 바이러스는 세계적인 확산을 넘어 인류의 삶의 방식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국제보건기구(WHO)가 사상 세 번째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을 만큼 감염력도 강하다. 이미 210개국 이상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전 세계 확진자는 지난달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곧 3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루 1만 여명이 사망하는 날도 있으니 가히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 할 만하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발병 초기의 일부 혼란에도 불구하고 체계적 방역시스템과 의료진의 헌신·성숙한 국민의식에 힘입어 확산세를 진정시켰다. K-방역은 실증된 표준대응법이 되어 전 세계로 확산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중앙사고수습본부는 “현재까지 40여 개국에서 한국의 방역 경험과 검역·치료·진단검사·자가격리 관리 경험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27일 개발도상국의 코로나19 보건사업에 4억 달러 이상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자금을 긴급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2003년 사스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극복한 경험과 방역체계를 과학적으로 정비했기에 가능했다. 바이오 기업들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진까지 1~2일 소요되는 기존 검사법을 대체할 수 있는 신속진단기술에 많은 투자를 해 6시간 이내에 확진 여부를 알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확진자를 신속히 찾아내 격리치료를 가능케 한 것이다. 신속진단키트 기술이 코로나19의 확산 억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기업의 신속진단키트는 팬데믹에 따른 국경 봉쇄를 뚫고 여러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몇몇 신속진단키트 제작 기업의 주식이 급등하는 흐름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인정하고 경제적 보상(수출)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성과를 있게 해 준 수많은 기초과학과 연구자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이러한 성과가 신속진단키트를 상용화한 연구자들의 노력과 투자만으로 이루어졌을까. 이번에 미량의 DNA샘플로도 신속진단을 가능하게 한 핵심 원천기술인 중합효소연쇄반응은 1993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개리 멀리스가 37년 전인 1983년에 고안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성과가 이렇게 수많은 인류를 살리는 데 기여하고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의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기여를 위해 학문적 탐구심을 불태운 과학자들의 노력이 쌓여서 만들어 낸 성과인 것이다. 이렇듯 기초과학자들의 성과는 평상시에는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 지 모르지만, 이제는 위기를 넘어 또다시 올지 모르는 다양한 위기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성장하기 위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과학자들이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튼튼한 과학기술 인프라에 의해 만들어진다. 과학기술 대국인 미국이나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과학을 외면하여 국가를 더욱 큰 어려움에 빠뜨린 작금의 상황을 보면 과학을 대하는 정치의 태도에 대한 중요성도 실감하게 된다.

지난 4·15총선에서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당선인이 드문 것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비추어 아쉽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무조건적 ‘성과’ 요구에서 벗어나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지에 귀를 기울여 주면 과학기술인들은 국가와 인류 발전을 위한 역할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부산산업과학혁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