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만 1년을 넘긴 1951년 6월의 일이다. 한탄강을 낀 경기도 연천의 미군 부대를 필두로 UN군 병영에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고열, 출혈, 신부전, 쇼크를 일으키는 이 병 탓에 UN군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전문가를 동원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병이었다. 전쟁 중 UN군에서만 수천 명이 발병했고 치사율은 10%를 웃돌았다. 미군은 이 땅에서 처음 맞닥뜨린 질병에 ‘한국출혈열(Korean Hemorrhagic Fever)’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림 서상균

정전이 된 뒤에도 미군은 이 땅에 8만 병력을 주둔시켰다. 해마다 수십 명 미군이 출혈열에 걸렸고 사망자가 생겼다. 한국을 떠나지 않는 한 한국출혈열은 미군을 떠날 것 같지 않았다. 20년 동안 200명의 전문가를 투입했지만, 허사였다. 그때 한국인 미생물학자가 이 문제를 맡겨 달라며 나섰다. 주인공은 고려대 의대 이호왕 교수였다. 그는 한국에서 유행하고, 한국이란 이름이 들어간 병이니 한국인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나섰다. 미군은 반가운 마음에 거금의 연구비도 선뜻 지원했다. 실상을 살펴보면 우리 국군이나 민간인도 괴롭히는 병이었으니, 미국의 두둑한 지원금으로 출혈열을 연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연구 5년 만에 이 교수는 휴전선 인근에 서식하는 들쥐에서 해결 실마리를 찾았다. 들쥐 오줌 속에 들어 있던 신종 바이러스가 비말 형태로 떠돌다, 밀접 접촉한 사람이 들이마시면 출혈열에 걸렸다. 이 교수는 바이러스가 발견된 곳 인근 강 이름을 따 한탄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한국출혈열과 한탄바이러스는 완벽한 짝을 이루었다. 6·25전쟁과 인연이 깊은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만의 풍토병인 줄 알았던 출혈열은 20세기 초부터 이미 만주와 중국에서도 만연하던 풍토병이었다. 미군은 그곳에 가보지 못했기에 한국의 풍토병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출혈열이 하나둘 발견된다. ‘유서 깊은’ 황열과 뎅기열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콩고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출혈열이 발견된다.

과학자들은 증상이 비슷한 출혈열의 병명을 지을 때 발견된 곳 지명을 땄다. 한국출혈열, 마르부르크출혈열 등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려 깊은 과학자들은 이러한 작명법에 반대하고 나섰다. 끔찍한 질병에 지명을 붙이면 그 지역 사람에게 두고두고 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머리칼이 쭈뼛 서는 에볼라출혈열도 최초 발병지인 자이르의 얌부쿠란 지명 대신 근처 강 이름을 따서 붙였다. 덕분에 얌부쿠 주민은 에볼라라는 끔찍한 낙인을 피했다.

2015년 WHO는 공식적으로 신종 질환명에 지역 인종 직업 등등 낙인 거리가 될 만한 것을 제외하기로 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같은 지역명이 들어간 병명은 거의 막차를 탄 셈이다. 하지만 일본뇌염이나 스페인독감처럼 기존 병명은 그대로 쓴다. 우리에겐 다행스럽게도 한국출혈열은 신증후 출혈열로 이름이 바뀌었다. 치사율이 10%를 넘는 병,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은 질병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아픈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자, 그렇게 보면 우한폐렴은 어떨까? 국제기구가 코비드19라고 정했음에도 여전히 우한폐렴을 고집하는 전문가가 드물지 않다. 그렇게 차별적인 명칭으로 부르면 뭔가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 생기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옷차림이나 언어로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서양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보기엔 아시아인은 죄다 중국인처럼 보인다. 우한폐렴이라는 이름이 유행할수록 우한이나 중국인에겐 낙인이 찍히고 편견과 혐오감이 쌓인다. 이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부르고, 덩달아 중국인으로 오인된 우리 교민이나 유학생이 피해를 본다.

이런 상황에서 ‘우한’을 고집하는 일이 옳을까? 더는 한국출혈열이 없는 것처럼, 우한폐렴도 없다.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