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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개성상인의 ‘품격’ /허성관

양극화 심화 우리 사회, 갑질 이어져 희망 잃어가

품격 있는 자본주의 위해 개성상인 ‘상생’ 본받아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필요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25 19:53:0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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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경제는 서로 힘을 모아 같이 잘살아 보자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된 데다 갑(甲)질이 더해져 많은 사람이 희망을 잃은 것이 사회 현실이다.

상생 정신만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데, 다행히 우리 조상은 세계 어떤 민족보다도 상생경제를 실천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향촌 사회 두레와 계(契)가 상부상조 정신에 바탕을 둔 상생경제의 수단이었다. 두레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모내기, 김매기, 추수 같은 고된 농사일을 마을 공동체가 공동 노동으로 수행하는 미풍양속이었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결과 많은 농민이 사실상의 소유권이었던 경작권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두레는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품앗이 형태로 두레의 상생 정신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은 계의 천국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계를 조직해서 상부상조 정신을 발휘했는데, 지금도 우리 국민 상당수에게 남아 있는 계 모임은 이런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암 마을 남평 문씨 동족계는 조선 시대 성공한 대표적인 계이다. 1667년 18명이 각각 벼 1섬을 기금으로 내서 계를 조직했는데 11년 후 100섬으로 늘어났다. 그사이 이 동족계는 마을 길흉사에 재원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상생경제 정신으로 만든 계모임이 공동체 행복 추구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의 장부인 ‘용하기(用下記)’는 300년 동안 같은 원리로 기록되어 왔는데, 계의 운영이 오늘날 상장회사와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다. 특히 투표로 의사를 결정했다.

조선에서 개성상인들이 상생경제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이들의 금언 중 하나가 ‘이불가이독식(利不可而獨食)’이다. 혼자서 이익을 독차지해서는 안 되고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도우면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상생 정신을 반영한 금언이다.

개성상인 박영진 가문에 전해온 ‘개성상인 복식부기 장부’(등록문화재 587호)에 이 상생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합작으로 인삼밭을 경영하면서 발생한 이익을 합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균등하게 나누었다. 인삼을 재배하려면 토지, 자본뿐만 아니라 재배 기술과 경영 관리가 필수이다. 박영진 가문은 인삼 재배를 목적으로 설립한 28개 합작사업 중에서 개인별 토지 투자 면적이 다른 8개를 제외한 나머지 20개 합작사업을 통해 이익과 손실을 균등하게 배분했다. 이는 토지, 자본, 재배 기술, 경영 관리의 가치를 같은 값으로 평가한 결과이다.

자본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배분방식이다. 19세기 말에 이런 균등 배분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개성상인의 상생경제 정신이 우리 민족 고유 DNA임을 말해주고 있다.

개성상인들은 차인(差人)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용했다. 어릴 때 사환으로 고용되면 급여는 없이 식사와 의복 등만 받고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차인으로 인정했다. 차인은 주인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인 점포를 열거나 주인의 지점을 맡아 경영했다. 지점을 맡은 차인은 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매년 지점 이익의 절반을 차지했다. 차인제도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상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개성상인은 자신의 아들을 자기 상점에서 일을 가르치지 않고 다른 상점에서 일을 배우며 차인으로 성장하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을(乙)의 처지를 이해하고 을의 처지에서 사고하며 상생 정신을 터득하게 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후계자 수업 예가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한국 사회의 재벌 3, 4세 문제는 바로 이런 차인제도가 사라진 데 기인한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자기 자식도 을의 처지에서 성장하게 교육함으로써 상생정신과 상생경영을 실천한 것이다.

개성상인들은 자금중개소를 만들어 단기자금 거래를 알선했다. 위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자금 수급을 고려하여 이자율을 결정했는데 이것이 시변(時邊)이다. 박영진 가 문 장부의 기록 기간인 1887년부터 1912년까지 시변 이자율이 대체로 월 1.25%로 연 15%였다. 물론 당시 시장 이자율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 낮은 이자율은 개성상인들이 이불가이독식을 실천했다는 증거다. 게다가 자금 융통에 꺾기, 담보, 보증, 선이자도 없었다.

어차피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면 품격이 있는 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 조상의 향촌사회 상부상조 정신과 개성상인의 상생경제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품격 있는 자본주의다. 이를 현재에 재현할 수 있는가에 우리 사회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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