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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화로대를 짊어지고 /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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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3-12 19:40:28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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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 전쯤이었나.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무슨 마니아들 같이 자전거 여행에 빠져서 그랬던 게 아니다. 당시 나이로 마흔이 넘도록 우물 안에서만 살아왔다는 자책이 들어, 무턱대고 떠난 게 발단이었다. 정말이지 자전거를 비롯한 여행용품 준비를 따로 한 것도 아니었다. 반송시장 어귀의 자전거 수리점에서 산 십삼만 원짜리 철제 자전거에 싸구려 1인용 텐트를 사 얹고, 누나 댁에서 빌려온 버너와 코펠을 낡은 배낭에 쑤셔 넣은 게 전부였다.

나서는 날 하필 종일 비가 내렸다. 그 탓이었는지 자전거를 타고 달릴수록, 살아온 날들이 너무너무 부끄럽고 한심스러웠다. 자전거를 굴리는 내가 그 한탄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애꿎은 페달만 씩씩대며 밟아 재낄밖에. 사이클 선수처럼 속도전을 치르려는 건 아니었는데, 만시지탄과 함께 그간의 게으름을 만회하려는 마음이 자전거 바퀴보다 앞서는 걸 어쩌랴. 계절마다 두어 번, 한번 집을 나서면 보름여씩 자전거로 돌아다니길 일 년쯤 했을 무렵, 밤마다 오줌 누러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하! 자전거 안장이 전립선에 나쁜 영향을 주는가 보다, 생각해서 자전거 타기를 일정 기간 쉬기로 했다.

무엇이든 한 번 손에서 놓으면 다시 잡거나 제 습관으로 되돌려놓기란 쉽지 않은 법. 다시 자전거를 타자니 뽀로로 장난감 놀이에 싫증 난 아이처럼, 어쩐지 내키지가 않고 꾀만 잔뜩 났다. 한동안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 이참에 등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나이에 바람도 쐴 겸 건강을 다지기 위해선 그만한 것도 없잖은가. 몇 번의 산행을 하고 다리에 근육이 붙으니까, 웬만한 산은 다 돌아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하여 이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산을 탔다. 영남 알프스부터 시작해 지리산, 설악산까지.

그러다 몇 해 전 늦가을. 혼자서 청도에 있는 화악산 종주를 마치고 음지리 계곡으로 내려오는 도중, 시커먼 장수말벌 패밀리한테 서른 방의 벌침을 맞고는 내가 직접 119 구급차를 불러 청도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지니고 있던 약으로 응급처치를 하여서 생명엔 지장 없었다만, 통증만큼은 무지무지했다. 그런 일 겪고도 세상에서 가장 바쁘다는 칼새처럼 이 산 저 산 올랐다가, 영축산에서 뒤로 벌렁 넘어져 손목 골절상을 입질 않나. 그 바람에 산행을 중단했다가 띄엄띄엄 오르고 했다.

올해 들어, 솔로 백패킹을 다닐 요량으로 접이식 화로대와 큼지막한 랜턴을 하나씩 샀다. 화로대는 캠핑용이라 등산 백패킹을 할 때는 사실 그다지 쓸 일이 없는데도 뿌득뿌득 산 이유는 따로 있다. 물론 배낭에 넣어 다니는 이상 장작불을 피울 만한 곳에서야 어쩌다 사용하는 일도 있겠지만, 백패킹 할 때마다 꼭 불멍(장작불을 피워놓고 멍 때리기 한다는 뜻의 신조어)을 하겠다는 뜻으로 구비한 건 아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나는 자전거 여행하면서 무시로 내달릴 줄만 알았지, 진정한 여행 의미를 찾지는 않았다. 등산 역시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했을 뿐, 참된 산행 의미를 찾으려곤 하지 않았다. 마치 느린 삶을 살아보겠다며 머나먼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놓고는, 육상 경주하듯 내달리는 작자들과 한 점 다름없이. 일편으로 보자면 그조차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낫다고들 하겠지만, 그런들 만고 허상에 가까운 저 혼자의 자위일 뿐 우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빨리빨리’에 젖은 습관과 성공에 목매는 일상을 벗고 느리게 살기로 완전히 탈바꿈하지 않는 한은.

하늘이 내게 병원 신세 지도록 만든 건, 이 점을 깨우치려 한 것 아닌지. 쉽게 넘겨버린다면야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느냐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는즉, 화악산에서 천천히 능선 길로 하산했다면 벌에 쏘이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또 영축산에서 느긋하게 내려왔다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차 시간에 쫓기는 일도 없었는데 여행이야 산행하면서까지 무얼 그리 서둘렀는지 참.

단순하고 느린 삶을 체험해보겠다면 일상의 습관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전거를 타면서도 산행을 하면서도 속된 의식을 고치질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백패킹이라면 배낭 무게를 가벼이 하는 게 맞는 줄 알면서도 굳이, 화로대와 랜턴을 짊어지고 다니려는 이유가 그와 같은 반성에서 비롯됐다. 지금이라도 화로대가 나의 발걸음을 느림보로 잡아주고, 랜턴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밝게 해준다면, 이들의 무게는 감당해도 괜찮지 싶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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