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가을날 부산의 해안선 어디에서든 먼 남쪽 바다를 바라다보면 사막의 신기루처럼 손에 잡힐 듯 대마도가 우리 시야에 들어온다. 이 섬 남서쪽 아소만은 주위의 산 풍경과 어우러져 선경으로 착각하리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옛적 이곳은 한반도 전역 해안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왜구들의 소굴이었다.

이 도적 떼는 일본 규슈와 세토 내해(內海) 연안으로부터 아소만으로 집결해 크고 작은 무리를 조직하였는데 중대급 소부대부터 대대급 전투 병력까지 거느렸다. 이들은 순풍을 기다려 조선 해안으로 몰려오거나 때로 중국의 산동반도 쪽으로 진출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 해적들은 나름대로의 야전교범인 ‘해운기(海雲記)’라는 책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책 이름만 본다면 서정적 시집을 연상케 하지만 실제론 온통 항해술이 기술돼 있다. 말하자면 공격 장소가 정해지면 쏜살같이 빠르게 목적지에 접근하는 항해술이다. 배에서 뭍에 오르는 순간 육전대(陸戰隊)로 재편되는 이 도적 떼가 효과적으로 노획물을 탈취하는 요령, 노획한 물건 간수 지침, 노예로 팔기 위해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들을 승선시킬 때까지 육지에서의 작전요령도 담았다. 이 책을 이름하여 ‘비씨(斐氏) 전술’이라 불렀다.

한반도에서 곡식이 추수되어 창고에 쌓이면 왜구들은 첩자를 통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습격하므로 한 번에 2만~3만 석 곡식을 탈취해 갔다. 이를 일본 내 하카타, 사카이 등으로 입항해 판매했다. 또는 중국 산동반도나 요동반도에 상륙해 곡식과 포로로 잡은 조선인 노예를 팔아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무역상선으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회항했다. 왜구 중 일부는 사카이나 하카타에 거주하며 무역상을 겸하는 상인과 무장들이었으므로 필요할 때는 말끔한 옷으로 갈아 입어 왜구라는 신분을 은폐했다.

고려 말 우왕 때 왜구 약탈은 극도에 이르렀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략하였다. 예성강 하구까지 쳐들어와 고려 군선을 불사르고 양민을 포로로 잡고 재물을 강탈했으므로 고려는 한때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천도론이 거론될 지경이었다. 특히 피해가 심했던 전라도 해안지역인 강진 장흥 고흥 해남의 백성은 왜구 공격을 피해 내륙 깊숙이 이동해 갔기에 이 지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왜구들은 오늘날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 한반도 곳곳에서 강탈한 물건과 노예의 집산지를 마련하였는데, 우리는 옛적에 이 섬을 ‘삼도(三島)’라 불렀다.

역사 기록을 보면, 그때 삼도는 육지와 제주 중간 해역에 동떨어져 우리 해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섬이었던 것 같다. 아소만에 동남풍이 불면 순풍에 돛을 펼쳐 달고 서쪽으로 달려 닿는 하룻밤 뱃길이었으므로 왜구는 제집 드나들 듯했다. 우왕 3년 고려 조정은 정몽주(鄭夢周)를 규슈 하카타에 사신으로 보내 현지의 절도사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와 외교적 협상을 하도록 했다. 이때 정몽주 선생이 “왜구들의 삼도 침략을 금지해 달라”고 제안한 사실이 ‘고려사 열전 7 정몽주’ 편에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판부사 허조가 세종 11년 3월 20일 임금께 아뢰기를 “삼도의 왜인들이 내이포(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로 이동해 와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당상관 좌대언 허성이 세종에게 보고하기를 “왜구 두목 좌위문태랑이 삼도에서 내이포로 와 장사하는 왜인들에게서 세금을 몽땅 거두어 갑니다”고 했다. 그때까지 삼도는 왜구들의 큰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고려 말부터 왜구는 ‘인화국화문 도자기’를 전라도 강진 고흥 일대에서 많은 수량을 확보해 삼도에 보물처럼 은밀히 감추었다. 이 지역은 고려 왕조의 관요가 있었기에 왜구들은 우리의 명품 도자기를 강탈해 하카타나 사카이 등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됐다. 왜구들은 당시 일본 시장에서 청자나 분청사기를 매매할 때 고객이 “조선 어디서 가져온 그릇이냐”고 물으면 “삼도에서 가져온 것”이라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그릇을 일본인들은 ‘미시마(三島·‘삼도’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우리 인화국화문도자기를 ‘미시마’라고 호칭하고 기록했다. 한국의 선구적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1941년 논문 ‘고려청자와 이조도자’에서 미시마라는 일본말에 반대하여 우리말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 호칭했고 광복 이후 젊은 우리 학자들은 ‘분청사기’로 줄여 사용했다. 오늘날 일본의 도자사 책자에도 ‘미시마’ 대신 ‘분청사기’를 쓰는 예가 늘고 있다.

삼도(三島)! 고립무원의 지정학적 특성으로 왜구에게 불법 점거되어 한때 그들의 보물섬 같은 소굴 역할을 감당하였고 ‘미시마’라는 지울 수 없는 천형의 흔적을 일본 도자기 문화에 낙인으로 영원히 남겨준 우리 섬이여!

경성대 공예과 교수·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