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설 연휴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학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10년 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한국에서만 200만 부가 판매된 화제의 책이다. 필자는 입시 면접 때 생활기록부 독서활동란에 기록된 책들에 대해 질문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거의 대부분 학생이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읽은 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대표적인 책이다. 면접을 보는 학생들의 답변은 똑같았다.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정말 읽었는데 입시 준비하다 잊어버린 건지, 면접 당시 당황해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인지는 눈동자와 얼굴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짓말을 죄라고 생각하는 아직은 순수한 학생들의 죄의식에 흔들리는 눈동자와 책의 제목조차 생소한 거 아닌가 의심되는 어색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안 읽었는데 읽었다고 하는 학생들의 답변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무엇인지 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앞세우며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유사한 면도 있지만, 확실히 다른 점은 면접장에서는 학생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볼 수 있는데, 사회에서는 그걸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표현은 눈물을 글썽이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지만, 지금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이 남발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특히 과정이 공정했고 결과가 정의로웠다고 평가하려면,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필자의 걱정은 ‘정의’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인식과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거니와, 자신이 그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데 대한 걱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즉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쉽게 답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 사람만 빼면 정의란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불의란 무엇인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제 두 개의 답을 합쳐보면, 정의란 정의롭지 못한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순환논법이다. ‘정의’란 단어 자체에 대한 의미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따라붙는 표현이 눈에 띈다. ‘맞서 싸우는 것.’ 현 정부는 ‘정의’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필요한 정책을 만들려 하기보다는 ‘맞서 싸우는’ 데 열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는 서울 강남 지역 아파트 가격 하락을 위해 초헌법적 수단이라 의심받을 수 있는 조치까지도 취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부가 아파트값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하려면 적정 아파트 가격은 어느 정도가 돼야 할까? 샌델은 책의 초반에서 공정가격 문제를 얘기한다.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물건 본래의 가치로 결정되는 ‘공정가격’에 따라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장사회에서는 수요·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지 ‘공정가격’은 허상이라는 것이 현대 경제학자들의 관찰 결과라 한다. 화가 난다고 해서 시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한 논평가의 말도 언급한다.
정부 의도대로 아파트값이 크게 떨어졌다 치자. 강남 아파트가 비싼 원인이 단지 투기꾼들의 장난질 탓이라면 아파트값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높은 가격 근저에 실수요가 버티고 있다면, 가격이 하락하면 바로 구매수요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한정된 공급에 수요가 늘면 가격은 오르는 것이 시장의 순리인데, 정부가 이 전쟁에서 승자가 되려면 최소한 떨어진 가격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떨어진 가격으로 아파트가 거래되도록 강제로 가격을 묶어놓아야 한다.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조건도 엄격히 해서 정부가 원하는 사람들만 아파트를 사게 만들어야 된다. 현 정부를 지지해왔고 앞으로 지지할 사람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줘야 전쟁에서 승리한 효과가 오래 갈 수 있다. 시장 경제로부터는 한참 멀어지는 결과다. 편향된 예측일 수 있다. 하지만 합리적 예측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청사진이 있었다면, 특정 지역과 주민에 대한 분노를 동력으로 정책을 추진한다는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동의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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