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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양극화 청산’ 나라 명운 가른다 /허성관

비정규직 대물림 우려, 조선시대 노비 떠올라

신분제로 고착되기 전 기득권 타파 혁신 필요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1-08 20:01:35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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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2차 대전 후 독립한 국가 중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다. 인구 5000만이 넘는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인 7개 나라 중 하나이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정예군 60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데도 나라가 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극심한 양극화를 문제의 핵심으로 꼽는다.

양극화의 핵심은 전체 근로자의 반이 넘는 비정규직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정규직의 절반 정도 급여를 받고,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열심히 노력해도 지금보다 잘살 수 없고, 출세할 수도 없고, 자식을 낳아도 자식마저 비정규적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신분이 대물림되는 상황이다. 이러니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희망은 없다. 희망이 없으니 결혼율이 떨어지고 출산율도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나라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겨우 굶어 죽지 않고 사는 자신의 삶이 자식들에게 대물림되는 점에서 비정규직은 조선 시대 노비의 처지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신분제를 타파하려는 처절한 투쟁이 민주화 과정이다. 노비제도는 조선에서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지만, 너무 늦었다.

조선왕조 때 노비는 사대부 사유재산이고 납세와 병역 의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다. 이 수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구의 3할 정도였다. 노비 수가 증가할수록 납세자와 병역 의무자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니 국가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1592년 일어나서 선조가 도망가자 노비들이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궁궐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숫자가 왜군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노비제도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노비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재위 1400~1422년)은 아버지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종부법(從父法)으로 바꾸었다. 양인 여자와 남자 노비가 결혼하는 사례는 드물고 양인 남자와 여자 노비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노비를 줄일 수 있는 대단한 혁신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사대부들이 집요하게 주장하자 다시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했다. 성군 세종 치세의 어두운 면이다. 임진왜란 기간 중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자 류성룡(1542~1607)이 주장하여 면천법(免賤法)을 시행했다. 노비도 전공을 세우면 양민이 될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는 법이어서 국난 극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조짐을 보이자 사대부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면천법을 폐기했다.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도 사대부가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포기할 수 없다는 기득권을 지킨 결과였다. 백성은 절망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성리학은 사람을 사대부 양인 노비로 나누고, 사대부가 국가를 다스리는 신분제를 하늘과 땅이 정한 의심할 바 없고 바꿀 수 없는 진리로 인식하는 사상이다. 사대부가 정치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선은 성리학이 국시였기 때문에 바로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들은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 기득권을 지키는 위사(爲士)가 먼저였다. 위사를 앞세우면 백성은 수탈 대상으로 전락한다. 조선에서 사대부 기득권을 깨뜨리는 정책이 성공한 예는 대동법 정도다.

성리학이 국시였던 조선에서 다른 사상은 설 자리가 없었다. 개혁적 사대부 윤휴는 대학과 중용을 성리학 종주 주자(朱子·1130~1200)와 달리 해석했다가 1680년 노론에 의해 사형당했다. 조선은 주자 성리학이 도그마가 된 침묵의 나라가 되었다. 양명학, 천주학, 실학은 수난을 당했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도 고종 때 비로소 알려졌다.

개혁 군주 정조가 사망한 1800년 이후에는 노론 일당독재에서 노론 소수 가문이 지배하는 세도정치로 퇴화하여 관료들 상호 간 견제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정치가 이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사익 추구 수단이 됐다. 이로써 국가 경영 체계를 혁신할 수 없어 조선이 망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양극화를 청산하지 못하면 이는 변형된 신분제로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양극화를 청산하는 핵심은 국민 모두에 기회가 균등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기회가 균등해져야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지키고자 이념과 정파의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양극화 청산이 어렵다. 정파가 다르다고 상대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으면 다 같이 망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서로를 경쟁 상대로 바라보아야 혁신할 수 있다. 이런 혁신이 조선왕조 멸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롯데장학재단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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