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산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됐다. 생각은 옹졸해지고, 고집은 세지고, 행동은 치우치고, 마음은 인색해만 간다. 나이가 들면 세상이 좀 편해지겠거니, 세상을 보는 눈이 뚜렷해지겠거니, 최소한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좀 느긋해지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침침해지듯이 세상이 그만 오리무중이다.

물론 이렇게 된 까닭이 세상 탓만도 아니고, 내 탓만도 아니다. 그래서 억울해진다. 세상 탓도 내 탓도 할 수 없어서 더욱 억울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억울함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우울감도 같이 몰려온다. 무기력이 뒤따라오고 나태, 허무함, 자포자기, 고립감, 절망감 따위가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 나와 달콤하게 나를 감싼다. 이젠 전화가 와도 받질 않으며, 연락할 일은 뒤로 미루고, 자기만의 방 속으로 기어들어 가 웅크린다. 이렇게 스스로 고립된 채 서서히 세상에서 지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평범하게 자라서 대학도 나오고 순탄하게 살아온, 어느 정도 사회적 입지를 가진 50대 남성의 이야기다. 함부로 스스로를 루저(?)라고 말할 수 없는, 여전히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어떤 사람의 눈에는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얘기로 들릴 만한 이야기다. 가족이 큰 탈 없이 엄연하고, 친구 역시 즐비하고, 당장 큰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주변에 손을 내밀어 줄 만한 사람이 있는 작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우울감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12월 추위를 피할 수 없듯 회피하거나 우회할 방법이 없다. 이 심리적 사태에 빠진 개인에게 우울이라는 덫은 보일러를 튼다고 회피할 수 있는 게 이미 아니다. 한 평범한 남성에게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 세계,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 한국이라는 사회다. 물론 나는 이 우울의 배경과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을 분석하거나 고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고자 하면 잘 살 수도 있는 한 사람이 갑자기 빠지게 된 이 우울이라는 현상 또는 사태를 적시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렇게 우울을 기술하고 있는 나는 스스로 돌아보는, 혹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가진 기득권(호사) 같은 것이다. 내겐 최소한 세상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있는 물질적 또는 심리적 여유가 있는 것이다. 잠시만 눈을 밖으로 돌려도 세상은 이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776일째 노숙농성을 하는 형제복지원 생존자들, 강남역에서 197일째 고공농성하는 김용희 씨, 쪽방촌에서 추위에 떠는 홀몸노인들, 장애인들, 쫓겨날 위협 속에서 날마다 잠을 설치는 외국인노동자들, 여전히 난민 지위를 못 받은 채 불안하게 떠도는 제주 난민들, 송전탑 아래서 갈가리 찢긴 가슴을 부여잡고 죽어가고 있는 밀양 할매들 그리고 이 사회 속에 분명히 존재하나 단 한 번도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괴물이고 공포고 불안이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장벽이기 때문에 ‘호사스러운 우울’에 빠질 시간조차 없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목적이어서, 이 사회라는 물리적 조건 자체에 이미 짓눌려 ‘심리적 조건’ 따위를 돌볼 여력이 애초 없다. 이 세계 속에서 그들은 절망을 말하기 전에 절망 속에 있고, 절망을 말할 겨를도 없이 삭제되는 존재인 것이다.

작금 온갖 언론과 미디어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대결로 도배돼 있다. 4+1이니, 검찰개혁이니, 좌파독재니 떠들어대지만 제도정치권은 오로지 내년 4월 총선의 표 계산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그들의 셈법에서 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표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는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가끔씩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만 눈에 띄는 길고양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령이 있다. 유령에게 우울은 언어도단이다. 유령 앞에서 우울이라는 이 시대의 흔한 질병은 호사가 된다.

작가·헤세이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