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양승동 사장이 이달 초 KBS 수신료가 1981년 이래 2500원으로 동결돼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게시판에 ‘KBS 수신료 전기요금 분리징수 청원’이 올라온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서명자가 20만 명을 돌파하자 마련된 기자간담회에서다. 양 사장은 KBS에 대한 국민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수신료 말을 꺼내놓고도 “송구하다”며 “수신료 현실화 역시 신뢰 회복을 전제로 추진할 장기 과제”라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앞서 국민청원에 “수신료 병합 징수는 법원에서도 적합하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공식 답변했다. 수신료를 둘러싼 이런 논란은 언론과 정권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KBS 수신료가 전기요금에 합산청구되다 보니 39년째 그대로인 걸 아는 국민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수신료를 이제 올릴 때가 됐다는 데 동의할 국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분리징수 청원에서 보듯 지금 내는 돈도 아깝다는 사람이 많은 지경이다. 수신료가 전기요금 고지서로 징수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하지만 단초는 전두환 정권이 제공했다. 연일 ‘땡전뉴스’나 반복하며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한 KBS를 두고볼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대대적인 KBS 시청 거부운동이 일어나면서 수신료 징수율은 44%까지 떨어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기세가 꺾이지 않자 수신료를 아예 전기요금에 통합시켜버렸다. 수신료 납부를 사실상 강제한 것이다. 수신료가 동결된 지난 39년은 권위주의 정권 2번, 보수정권 3번, 진보정권이 3번 들어선 세월이다. 매번 수신료 인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보수정권 때도 진보정권 때도 똑같이 수신료 거부운동이 벌어진다. 이 아이러니가 지금 KBS가 처한 현실이다.

“수신료는 올리는 게 맞다. 그래야 그걸 근간으로 기계적 중립성이라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국민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KBS가 차별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부산대 조항제 신문방송학과 교수)

KBS 사장 상당수는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앉혀 방송 장악을 꿈꿨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정연주 사장을 교체하는 과정과 문재인 정권에서 고대영 사장과 이인호 이사장을 교체하는 과정이 무엇이 다른가. 야당 시절엔 여당의 언론 장악 시도를 욕하지만 여당이 되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언론학자들에게서조차 “국민은 정권과 KBS가 한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나온다.

정권은 방송 장악을 넘어 언론 통제까지 시도한다. 최근엔 법무부가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검찰이 형사사건 수사상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범죄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사안을 언론이 보도하면 피의자의 인권이 침해된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언론에 재갈 물리기다. 누가 왜 수사를 받는지 언론, 아니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겠다는 뜻이다. 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제를 도입해 알리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알리려했던 노무현 정부 때 기자들이 관공서에 전화를 걸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공보실을 통하세요”였다.

언론 취재가 제한되면 피의자 인권 보호의 이익보다 권력 감시 기능의 약화로 인한 국민 알권리 침해의 소지가 훨씬 높다. 피의사실 보도통제의 수혜자도 ‘조국’이나 ‘유재수’가 될지언정 ‘이춘재’나 ‘고유정’은 아니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감추고 싶은 정권의 비리는 모두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 정부 자체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을 파헤쳤던 언론보도와 그로 인해 촉발된 ‘촛불혁명’의 최대 수혜자가 아닌가.

따지고 보면 정부의 언론통제 시도에 가장 저항해야할 매체가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사주나 광고주, 정파적인 독자나 시청자에서 가장 자유롭고 독립적일 수 있는 운영구조 덕분이다. 그런데도 역대 어느 정부에서든 KBS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정치 지형이 복잡하고 정치권의 방송 편향 압력이 우리보다 결코 작지 않은 곳이 영국이다. 그러나 조직 구성원들의 엘리트주의에서 비롯됐든, 정파주의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에서 비롯됐든, BBC의 보도 정확성이나 정치 중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우리나라 공영방송보단 훨씬 높다. 수신료가 KBS의 10배이지만 징수율은 90% 이상이다. 정치권과의 비판적 거리두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권이 수신료 거부를 BBC 압박용으로 들먹일 정도다.

장기 동결 상태라지만 그래도 KBS는 수신료로 연간 6500억 원을 번다. 그런데도 올해 1000억 원 적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전체 직원의 절반 이상은 1억 이상 연봉자다. 최근 KBS 간판 9시 뉴스 시청률은 주말 아닌 평일에도 한 자릿수로 떨어진다. 국민이 KBS에 갖고 있는 신뢰 수치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