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최근 읽었다. 주인공 빌헬름이 연극과 여행을 하면서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정교한 플롯과 극적인 스토리 전개뿐 아니라, 청년 빌헬름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어떤 경로로 확장되고 발전하는지 잘 보여준다. 덜 성숙한 인간에게 전수하는 교양의 세례와 습득이 당시 독일 사회 신분제도·풍속과는 다른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곱씹어보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교양’이라는 말이 주는 다양한 어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는 교양에 대해 어떤 편견을 지닌다.
이 편견은 이른바 고등교육을 받는 엘리트 계층이 오랜 시간 만들어낸 자신들의 업보이자 대가다. 즉 ‘교양인’은 매체에서 보통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이들의 ‘고상한’ 행동과 말투는 종종 보통 사람에게 희화화의 소재가 되며 허위의식과 가식의 불명예를 스스로 안기기도 한다. 구체제에서 가진 자들에게는 일종의 신분 증표로, 근대 이후 민주주의·자유주의적 물결이 팽배해진 요즘에는 교과과정 코스나 지극히 추상화된 개념 정도로 그 의미가 희석화된 말이 교양이다.
교양은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인가, 개개의 인간이 갖춰야 할 품성의 총체인가. 흔히 많이 배우고 지식이 넘쳐나는 상태와 교양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둘은 관계가 깊지만, 지식인이 곧 교양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많이 배우지는 않은 사람이라도 교양인의 덕목을 훌륭하게 갖춘 경우도 수두룩하다.
유교문화에서 말하는 ‘덕’이 교양과 근접한 뜻을 지닌 개념이라 볼 때, 덕은 ‘갖추는’ 게 아니라 ‘쌓고 수련하는’ 품성의 하나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된다. 따라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식·정보를 습득하는 일뿐 아니라 수많은 직간접 경험과 인식 능력을 쌓고 자라게 하는 과정이 필수다. 괴테 소설 제목에 ‘수업시대’가 붙은 이유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들어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사는 게 우리네 ‘인지상정’으로 통하는 ‘덕목’이다. 여기서는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한 개인의 처지와 상태에서 삶의 목표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상정한다. 자신을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춰서 바라보는 자기인식이, 공동체에서 공통분모를 이루는 요소가 ‘인지상정’으로 둔갑해버린다. ‘사람이라면 으레 그리 생각하게 된다’는 오래된 인지상정의 습속이 사회문화적으로 널리 확산될 때는 교양이나 덕도 한갓 시효가 한참 지난 잠꼬대가 되어버린다.
교양보다는 정보력이,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주기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된 시대다. 수능에 쏠린 국민적 관심이 유별난 까닭도 동시간대에 이뤄지는 비교·경쟁이 ‘교육열’이라는 인지상정을 두르고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진정한 의미의 교양인이나 군자가 거의 사라져버려서 한탄하는 말이 아니다. 괴테가 염두에 둔 교양은 세계시민으로서 우뚝 서기 위한 삶의 지혜와 실천적 지식을 아우른 개념이다. 여기에는 자기희생과 배려가 마땅히 포함된다. 이런 교양인의 덕목 따위는 성직자나 극소수 성인의 몫으로만 넘기고, ‘우리끼리’ 인지상정의 도락과 사회적 욕망에 매진하면 된다는 깊은 사회적 무의식이 ‘이탈자’를 양산한다.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부귀와 명예에 집착하는 이들을 포함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했다는 자괴감에 짓눌려 목숨을 버리는 이들까지 삶의 궤도이탈자들이 우리에게 안기는 상처와 고통은 지금도 겪고 있는 그대로다.
이는 전인교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악덕’이 악덕으로 통용되지 않고, 성공의 열쇠로 인식되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미덕과 악덕의 교묘한 자리바꿈이 들불 속 풀무질처럼 번졌던 셈이다. 그렇게 ‘뒤집힌’ 세상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삶이 그렇게 명료할 수가 없다. 제 삶에 유익하냐, 그렇지 않느냐는 척도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분명 교양이 죽은 사회다. 교양이 죽은 사회일수록 또한 ‘교양강좌’의 붐도 드세다. 이런저런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이 마치 이제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려는 듯이 인간과 문화를 공부한다. 속된 세계에 흠뻑 젖어 자신도 모르게 ‘반교양’의 첨병에 섰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찾는 교양이란, 마치 구렁텅이에 막 빠져나온 자가 자신의 몸을 온전히 씻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향수부터 찾는 경우에 비유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교양 열풍은 왠지 씁쓸하다. 교양이 내면화되지 않고 외관 액세서리로 쉽사리 전락한다.
악덕과 미덕이 뒤바뀌고 교양에 대한 편견을 양산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야말로, 저 숭고하고 덕망 높은 교양인이 가득한 사회의 청사진이 이미 실종했다는 슬픈 증거다. 죽은 교양의 사회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참, 어려운 숙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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