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지중해 바닷길이 막혀 동방무역이 정체됐던 시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 루트를 통해 ‘검은 황금’이라 불리던 후추를 사고파는 무역이 다시 살아났다. 이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정벌과 식민통치를 통해 후추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포르투갈은 황금 시기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후추 무역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콜럼버스의 ‘무모한’ 탐험을 지원한 스페인 국왕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포르투갈을 뛰어넘는 경제 반전을 일으킨다. 정복과 착취의 어두운 역사였지만, 아즈텍과 잉카의 은을 독점 소유하면서 스페인은 세계 공용화폐를 가장 많이 보유한 최강국으로 전성기를 누린다.

바다를 통해 해양제국 형태를 갖춘 열강은 동방의 사치품과 향신료를 갈망하던 유럽 소비 시장을 장악하고자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을 중국에 주고 중국에서 선적한 사치품을 유럽에 실어 나르는 동시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을 통해 은광 채굴 노동력까지 확보하는 ‘대양 삼각무역 체계’를 구축한다. 글로벌 해양무역이 시작된 셈이다. 도자기 차 후추 은광 노예 유럽 남미 그리고 중국·인도까지.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자본력을 바탕으로 소비재 수요와 공급을 촘촘히 연결해 경제대국으로 가려 했던 서구 선진국의 전략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Paises Bajo’라는 스페인어가 있다. ‘낮은 나라들’이란 뜻으로 스페인 식민지역이었던 벨기에, 룩셈부르크처럼 해수면보다 육지가 낮은 지역을 일컫는다. 이 ‘낮은 나라들’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한다.

당시 유럽에는 동방무역을 주로 하는 주식회사 격인 민간회사의 설립과 운영이 유행이었고 이들 회사를 ‘동인도회사’라 불렀다. 네덜란드 정부는 난립하던 동인도회사들을 통합한 ‘통합동인도 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만들게 한 뒤, 민간 자본을 이용한 자율적 운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부터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 희망봉에 이르는 광대한 ‘단일 해상운송로’를 확보한다.

해상운송로 곳곳에 요새를 구축해 항로 안전성까지 보장하는 대양무역 활성화 노력을 통해 네덜란드는 시장경제 체제 아래서 해양제국 입지를 다지며 국력을 신장시킨다. 글로벌 해양무역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입됐고 독점적 지위에 대한 경제적 수월성이 확보된 셈이다.

유럽 근대사에서는 ‘해양제국’이라 불린 국가들이 선점과 독점의 방법을 이용해 국부를 쌓아온 사례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확보한 바닷길과 안전이 보장된 무역항로를 제국 영토로 여겨왔다. 하지만 과거 같은 물리적 정복과 착취가 허용되지 않는 오늘날 스스로 소유하지 않은 경제자원의 선점과 독점 방식이 과거와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의문이다.

금세기 최고 석학이라 불리는 유발 하라리가 저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의미 있는 제안을 했다. “기술 혁명은 앞으로 수십 년 내에 탄력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인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가장 힘든 시련에 직면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중략). 개별 국가는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전을 해결하기에 올바른 틀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중략).”

놓인 상황과 현안이 서로 다른 국가들이 범세계적 정체성과 공유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정답은 바다다. 해양은 세계가 공유해야만 하는 ‘공통 자원’이다. 단순한 ‘교역로’로 해양을 바라보던 과거 해양제국의 관점에 진일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온난화와 연계돼 오늘날 최고 쟁점이 된 ‘해양환경오염 저감’ 역시 글로벌 이슈인 것은 분명하지만 특정 국가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슈가 있으니 대안을 고민하고 그 노력의 결과를 경제효과로 연결하면 된다. 해양 환경오염을 막는 기술과 파생되는 신산업의 성장 그리고 경제 가치 창출의 선순환 구조. 이를 위해서는 해양을 교역항로나 영토로만 보는 시각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해양으로부터 파생되는,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전 지구적 공유를 통해 창출할 수 있는 경제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이 바다에서 필요한 것이 저 바다에서는 필요하지 않을 리 없다. 오대양이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나눈 명칭일 뿐, 원래부터 바다는 하나였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