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배급사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를 운영한 지 만 3년을 꽉 채워가는 겨울이 왔다. 그간 나름의 경험치가 쌓였다고 판단하시는 것인지 이번 연말에는 유난히 배급에 관해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온다. 그동안 배급은 업무 특성상 쉬이 정의하기 어렵다고 늘 연막을 치고 달아나고는 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말을 찾아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돌이켜보면 씨네소파는 언제나 ‘만남’의 감각을 고수해왔다. 배급할 영화를 ‘선정’한다기보다 영화를 ‘만나’ 왔고, 영화를 ‘홍보’하기보다는 이 영화와 관객이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했다. 씨네소파는 배급을 ‘영화와 관객 사이의 모든 일’로 정의한다.

그러니 오늘은 마치 학창 시절에나 써보았던 편지처럼 경솔한 마음으로 한 가지 고백해볼까 한다. 부산 유일 독립영화 배급사가 아니라, 같은 반 친구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하던 고등학생의 정체성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 본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날에, 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며 구태여 부산으로 내려오신 감독님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비좁은 술집에 우린 마주앉았다.

반복되는 근황 토크로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여러 잔 맥주에 기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소주 한 잔이 없는 것을 멋쩍어하며,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 ‘기억할 만한 지나침’(2018)을 배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꼭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담보되어야 한다면. 만든 것만으로도 영화의 의미를 다한 것이 아닐까 한다고. 그래, 그날. 비는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어쩌면 우리는 우연히 그 영화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돌풍이 몰아치는 나의 영혼을 끌어안고 영화를 보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나는 일순간 내 속의 모든 바람을 잠재운 시간과 만났다. 저수지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와 시인 ‘김’의 녹록지 않은 삶을 그려내어 언뜻 버겁기만 해 보이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체증이 가신 듯한 뜨거운 개운함만을 내게 남겼다.

아마도 그건 이 영화가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감싸고 위로하던-받던 세계를 향한 오마주이며 지나쳤던 작은 것을 위한 한 편 시와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 제목에서 따온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마치 꼭 그의 시구 같은 흑백의 유장함마저 서려 있다.

2시간46분 길이의 이 영화가 ‘개봉’돼 관객을 만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나는 그만 천진한 마음으로, 또 사랑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당신에게도 지친 영혼을 씻어주던 그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난 뒤 지인에게 둘러싸여 있는 감독님에게 다가가 (개봉시킬 돈도 사람도 없으면서) 무책임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언젠가 어떤 감독은, 계속해서 돈 안 되는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두고 “이런 것도 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던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배급은, 여전히 돈이 없고, 아직 세상 모든 것은 다 돈이지만, 이런 영화도 개봉할 수 있다는 작은 선언이다. 어떤 감독에게는 아직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신호이고 어떤 관객에게는 아직 영화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외침이며 현실에 치여 자꾸만 길을 잃는 우리의 표지판이다. 그때 그 좁은 술집을 채우던 침묵을 달아나게 하고, 혼자 울고 있던 영화에게 다시 말하고 싶다. 너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기쁨이, 우리 설렘이 더 크다고.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씨네소파가 올해를 마무리하며 관객에게 선물하는 영화이다. 다가오는 19일,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영화의전당을 통해 이 영화를 당신에게 건넨다. 우리 손을 떠난 이 영화가 당신에게 소용 있기를, 올 한 해 당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그 모든 날카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부디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 무례한 글을 감독님은 아마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꿈과 병은 널리 알리라 했지. 오늘의 꿈은, 씨네소파의 꿈은, 좋은 영화를 만들고도 괴로워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씨네소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