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태풍이 유달리 잦았다. 8번이나 지나갔으니 1950년 이후 가장 잦은 횟수로 평년의 2배가 넘었다. 태풍은 아무리 방비를 해도 곳곳에 재해를 남긴다. 2003년 9월 19일,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도 그랬다. 특히 영남지역에 피해가 많아 부산항의 대형 크레인을 넘어뜨려 항구를 마비시키고 수백 척의 선박을 파괴했다. 그날 거실에 앉아 있던 나는 거대한 바람의 주먹이 베란다 통유리창을 단번에 박살 내고, 무차별 난입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그날 밤늦게 당시 근무하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67세의 남자가 수일간 지속된 가슴 통증으로 실려 왔는데 ‘대동맥박리증’ 환자 같다고 했다. 아뿔싸! 하필 이런 시간에…. 나는 태풍을 뚫고 간신히 응급실에 도착했다.

환자는 상행대동맥에서 발생하여 복부까지 타고 내려간 혈관박리(내막과 외막이 갈라짐)로 곧 쇼크에 빠질 듯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보호자들 못잖게 잔뜩 긴장한 나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사망률이 매우 높다’는 설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태풍의 위력이 하도 드센지라 수술 팀을 구성하기도 쉽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람을 데려오느라 병원 앰뷸런스가 동원되기도 했다. 소란스럽게 구성된 수술 팀은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거르는 강행군을 했다. 사실, 이런 위험하고 힘든 수술은 집도의(執刀醫)에게 큰 부담이 된다. 몸이 힘든 것은 차치하고 ‘결과가 나쁘면 어쩌지?’하는 염려가 항상 앞서기 때문이다.

최근 날로 늘어나는 의료분쟁은 환자(혹은 보호자)와 의사 사이의 상호불신이 가장 큰 원인이다. 환자들은 언제나 신속한 진단과 치료, 친절하고 확실한 설명, 좋은 결과 등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나 병원이 항상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에게도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질병의 특징상 환자나 가족의 기대에 못 미치게 설명이 궁해질 때도 있다. 병은 중증이나 환자 측이 의사의 설명을 믿으려하지 않을 때도 있다. 치료경과가 돌변하여 후유증을 남기거나 예기치 못한 환자의 사망이 있을 수도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의료분쟁에 휩싸일 때도 있다.

이런 일에서 나도 항상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해 말 임세원 교수(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가 담당하던 환자에게 살해당한 안타까운 사건은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다. 그럼에도 병원 내 폭행과 난동사건이 아직 줄지 않고 있다니 큰 문제이다. 에릭 시걸은 소설 ‘닥터스’에서 “우리의 기대만큼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의사는 수없이 고뇌한다. 그들은 상처 입은 치유자다”고 의사의 어려움을 잘 표현했다. 아무튼 환자 측과 의사 사이에는 역지사지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앞서 말한 수술은 상황이 너무 급박해 앞뒤 가릴 것 없이 시작됐다. 인공심폐기를 부착하여 심장을 정지시킨 후 심장에서 나가는 상행대동맥을 인공혈관으로 완전히 교체했다. 밤 11시에 시작된 수술이 다음 날 오후까지 지속됐다. 그래도 이번엔 큰 보람이 있었다. 수일 후 환자가 기력을 회복하자, 치료에 동참한 젊은 의사들의 얼굴에 저마다 미소가 가득했다. 병원에서 환자만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B 씨와 같이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회복되었을 때 의사들은 얼마나 큰 기쁨과 보람을 맛보는지 모른다. 그것은 외과의사라는 존재감의 회복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흉부외과의사가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가 퇴원하는 날 우리는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나누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모든 일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물려준다기보다는 세월에 밀려난 편이다. 가장 익숙했던 것들이 하나씩 멀어진다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참을 만했다. 다만 정들었던 환자들과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다. 심장이나 대동맥 등의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집도한 의사에게 깊은 신뢰를 갖는다. 주치의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

요양병원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B 씨가 불쑥 찾아왔다. “날 살려주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요!” 하며 외래진료를 원했다. 활짝 웃는 그와 악수를 나누며 우리 사이의 소중한 인연을 잠시 되새겨 보았다. 찾아오는 환자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츰 환자가 늘어나자 한 주에 이틀씩 외래환자를 보기로 했다. 정들었던 환자과 재회는 나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가능한 한 충분한 시간을 내어, 수술받던 당시의 힘들었던 일을 회상하기도 하고 가족과 자녀의 근황을 물어보기도 한다. 바쁘기만 했던 지난날의 진료실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마음의 여유는 입원 환자를 대하는 자세로 연결됐다. 가끔 엉뚱한 행동을 하는 치매환자도 가까운 친지 같이 느껴진다. 환자와 의사! 결코 예사 인연이 아니다. 오늘도 이 소중한 인연을 잘 보듬고 가야지, 다짐해 본다.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