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해 노벨생리학상에 이어 올해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지만 한국·일본 노벨과학상 수상자 스코어 0 대 24를 바라보는 우리는 아픈 시간을 보냈다. 해마다 10월 둘째 주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시작되면 ‘우리나라가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입시 위주 교육과 중장기 과학기술 정책 부재’라는 판박이 기사가 보도된다. 이러기를 이삼십 년, 원하던 일이 일어나던가? 과학을 과학으로만 풀려고 하는데….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이 핵심 연구를 시작해 상을 받기까지 평균 31.4년이 걸렸다고 한다. 30년 전 연구 실적으로 평가한다고 보면 1990년대 우리나라 기초과학은 초보 수준이었다. 실질적 연구기반을 갖춘 ‘창의적 연구진흥사업’은 1996년에야 시작됐고 기초과학연구원(IBS)이 들어선 것은 2011년으로 단순 논리로 보면 시간이 더 흘러야 될지 모른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직업을 잃은 하급 무사들을 국비 유학생으로 서양에 대거 보냈는데 이들이 돌아와 연구자와 교수로 현대 기초과학을 일본에 심었고, 1917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하는 등 20세기 초 이미 세계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 환경을 갖췄다.

그 결과 1949년 입자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을 시발점으로 70여 년 동안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24명 나왔다. 국제 학술정보 분석업체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Clarivate Analytics)에 의하면 최근 5년간 피인용 상위 0.01% 연구자인, 일명 ‘노벨상 유력 후보 리스트’에 일본 7명, 한국 3명이 올랐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 축적의 시간 차이에도 이 통계만 보면 노벨과학상이 가까이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우리는 현재 과학과 인문학이 발달한 선진 다섯 나라의 문화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선 영국이고,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국민 절대다수가 100년 이상 독서를 했다는 것이다. 영국보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먼저 앞섰지만 더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독서를 하지 않아서였다. 우리의 경우 어른들이 안 읽으니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대학 4년 동안 인문고전 관련 책 10권을 읽은 자 얼마나 될까?”

국가별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를 보면 1위부터 5위까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순으로 선진 다섯 나라와 일치한다. 노벨과학상은 인문학 토양 위에 핀 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전 국민의 인문고전 독서를 위해 정부 내에 번역국(飜譯局)을 두었고 1881년부터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 엥겔스, 니체 전집 등 20세기 이전에 이미 서양의 주요 고전을 거의 다 번역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주인공 바자로프는 친구 아르카디에게 걱정스럽게 말한다. “내가 보니 자네 아버지는 푸시킨의 시를 읽고 있더군. 그런 건 아무 데도 쓸모없다고 설명해 드리게.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엉터리는 집어치울 때도 됐지. 뭔가 실질적인 것을 읽으시라고 권해 드리게.” 이게 우리의 현주소이다.국제기구에서 인턴을 한 제자의 얘기가 우리나라 학생에게 붙는 형용사는 ‘지적인(intellectual)’이 아니고 ‘영리한(intelligent)’이라고 한다. 영리함에는 ‘지식’이나 ‘기억력’의 냄새가 물씬 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목민심서를 꿰뚫고 두보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30편을 외우는 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 ‘지적인(intellectual)’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문학적 내공을 갖춘 지적인 인재들의 과학에 대한 집요함의 결과가 노벨과학상이다. 인문학은 창조의 기반이며 인식 전환을 통해 질문과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교육이 교육만으로 해결되지 않듯 과학을 과학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을!

부산영재교육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