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 갈등이 불거지면서 불매 운동의 아이콘이 된 일본 의류업체가 있다. 보편을 내건 기업 임원답지 않은 사람이 SNS에 올린 말로 구설에 오르더니 요 며칠 전 방송에 내보낸 광고 문구가 다시 구설에 올라 경을 치고 있다. 지난 7월엔 실수라며 사과하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이달엔 일언반구 대꾸가 없다. 또 무슨 경을 칠 지 몰라 지레 조심이 아니라면 지난 7월 구설에 올랐던 말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식의 배짱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실언은 없다.’ 프로이트에게 배운 인상 깊은 내용 하나다.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국회의장의 가십 기사를 읽게 된다. 전날 새로 회기를 시작한 의회의 개회식에서 의장이 ‘폐회를 선언합니다’고 잘못 말했다는 내용이다. 흥미를 느낀 프로이트는 즉시 의장의 정신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의원들의 반복되는 다툼이 지긋지긋했던 의장의 무의식이 실언을 낳았다는 결론이다. 의장의 실언은 후일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구조가 시킨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의장이 무의식을 탓하며 실언의 책임을 면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구조는 역사 위에 있는 것이겠군요!’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답변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푸코가 의지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후견인 노릇에 충실했던 뒤메질 혹은 캉기옘의 말이었던가? 뉘신지 가물가물해도 말의 기억은 또렷하다. 구조와 역사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한 푸코에게 던진 재확인의 말투는 차라리 칭송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구조는 일반적 선입견처럼 어두운 지하에 숨은 것이 아니며 천상에 훤히 드러나 있다. 천상에서 드리운 빛은 지상의 빛깔로 산란할 뿐이며 우리는 다만 현란한 빛의 부분들, 그 온갖 빛깔을 볼 뿐이라고. 그렇다면 역사의 빛깔에 익숙한 우리 눈은 분명 드러나 있되 너무 환한 구조의 빛을 볼 수는 없다. 마치 태양을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리는 유약한 육안처럼. 육안이 보지 못하는 경우는 또 있다. 빛과 반대로 전혀 빛이 스며나지 않는 암흑, 빛마저 삼켜버린다는 블랙홀 같은 캄캄한 암흑천지라면 말이다. 그래서 천상의 태양이 그러하듯, 천상의 암흑이 우리를 덮치는 상상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이것의 신화적 버전은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벌이는 영겁의 술래잡기 같은 것이 있겠는데, 두 신은 그저 서로 쫓고 쫓길 뿐이나 그 틈바귀에서 인간은 흥망하고 따라서 희비도 갈린다. 그러나 신의 선악은 분명 인간의 시비 바깥에 있으니 선악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 되고 삶이 소중한 만큼 허무할 것은 없다.

꼭 남을 못살게 굴기 위해 태어난 야차나 마구니 무리를 보는 것 같아 끔찍한 생각이 드는 여름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이 여름만 아니라 내내 그랬지만 소나기처럼 쏟아낸 국내외의 불편한 소식은 차라리 소음이라면 다행이지 싶을 정도였다. ‘장강의 뒤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식의 무가치한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대다 지친 육신과 정신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청구라도 하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아마 이런 피로감, 이렇게 지쳐버리고 말 것이라 의도한 것은 아닐까 싶어 미필적 고의까지 의심하며 말이다.

말은 의미를 담고 의미는 의도를 가진다. 또한 공교로운 우연의 누적이 역사는 아니다. 역사의 문맥에서 우리는 의도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선악도 판단할 수 있다. 오늘날 다투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쪽은 우리를 괴롭히는 이 체계의 기원을 식민지 이래의 역사로 지목하고 시정을 요구한다. 나머지 한쪽은 모든 과거는 묻어둘 것을 주장한다. 끝없이 이어질 듯 보이는 역사와 몰역사의 평행선은 언제나 소실점에 도달할까? 아마 곧.

공자가 냇가에 서서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으니’라고 감탄하며 무엇을 느꼈는진 그이만 알 것이다. 하지만 물이 아니라 물의 쉼 없는 흐름을 통찰한 공자가 그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황하를 노래한 이백의 무상함을 느끼고 허무로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미는 아마도 표면적 효과, 반짝임, 거품일 뿐이며 우리에게 정말로 깊은 감동을 주는 것,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체계다.’ 정신분석가 라캉을 언급한 끝에 나온 푸코의 말이다. 어쩌면 불화 끝에 어느 정도 화해한 사르트르에게 대답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푸코는 감동을 주고 지탱해주는 바람직한 어떤 것이 분명 있다는 믿음을 고백한 것이리라.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이 또한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을 행복이라 하든 생명이라 하든 무엇이라 하든,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는 노랫말처럼 염세주의 내지 허무주의를 물리친 세상은 기필코 오리라. 이것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