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어수선하니 수많은 의혹과 비난, 해명이 매스컴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언어 공해’란 말이 어제오늘 회자된 게 아니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언어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세상이다. 마치 진실인 듯 소통의 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젓고 다니는 가짜 정보가 있는 반면, 설마라 생각했던 정보들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맥락을 갖춘 경우도 흔하다. 겉으로는 진실과 거짓의 대결처럼 보이는 최근의 양상들을 보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동안 합리와 민주의 방식으로 논의하고 합의했던 형식 이면에 작동했을 법한 어떤 힘의 메커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가 정의를 말하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정작 이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어두운 영역의 요소일 수도 있다. 영웅이나 강자가 지닌 힘과 권세가 역사 흐름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회의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즉 결국에는 힘센 자가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논리가 진리로 통용되고, 여기에서 절망이 솟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도 평소에는 상식적이고 반듯한 판단을 하면서도 공론의 장에만 들어오면 기득권의 논리에 아무 비판 없이 합류하는 사람이 제법 보이는 일도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이들은 정황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나 전개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오히려 뼛속 깊이 각인된 어떤 선입견에 맞춰 그들의 사고를 정합시킨다. 이들의 ‘논리’에 진지한 문제제기나 비판은 손쉽게 거부당하거나 무조건 배척해야만 하는 거짓과 억지로 변모한다.

사람이 지닌 여러 한계 가운데서도 아주 오랫동안 고질병처럼 스스로를 갉아 먹는 것이 바로 ‘습성’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도 ‘사랑의 역사(役事)’에서 습성이야말로 유한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특성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이라 했다. 물론 그는 ‘영원성’에 대비해서 습성의 속성을 비판했지만, 이 습성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과 판단의 밑바닥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원동력이 될 때 비참함은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의견이 달라서 서로 논쟁하거나 갈등을 겪는 것과, 저도 모르게 강력하게 형성된 습성에 따라 가치를 저울질하는 사람들끼리의 대립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전자는 문제 해결 가능성이 표면에 드러나지만, 후자 경우는 인식 차이의 골을 점점 명백하게 만들어서 결국 서로 도외시하거나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감정 문제로 전이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데올로기는 헤게모니를 욕망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쥐느냐는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빛깔에 관계없이 동일한 습성을 지닌 집단의, 상대 진영에 대한 힘의 우위의 정도에 따라 판가름 난다. 여기서 승자가 된 집단들의 공통적이고 무의식적인 습성은 유무형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전승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에게 내면화된 특정 이데올로기가 그 초기의 ‘진실성’과 ‘신선함’을 잃고 껍데기를 뒤집어쓴 유령의 형식으로 기생충처럼 사람들을 전염시킬 때는, 아마도 시대상이 변곡점을 맞이할 무렵이 아닐까.

오랫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암약해왔으면서, 또한 그것으로 자신들의 힘과 주도권을 쥐어왔던 세력들이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아 위기를 느낄 때 흔히 쓰는 수법이 ‘찬란했던 과거의 한때’를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기억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일수록 이들에게 손쉽게 호출당하거나 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우리가 자각하지도 않은 사이에 습성은 사람들을 서로 이간질하고 기만한다. 그 습성의 존재를 깨달으면서도 선뜻 떨쳐버리기 힘든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방식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래 자신의 생각이 그러했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원래 뜻이 자기기만이나 허위의식과 관련이 크다는 사실을 안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으리라.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던 쇠사슬에서 풀려난 노예가 갑자기 해방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어 스스로 쇠사슬을 자신의 발목에 다시 채우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쇠사슬에 묶여 구속된 상태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새삼 깨닫게 된 노예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예전에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지옥임을 믿고 싶어한다. 이러한 대중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기득권세력이 겉으로는 정의를 외친다. 대중 습성을 수단으로 해서 도모하는 힘세고 많이 가진 자들의 술수에 언제까지 빠져들 것인가. 습성은 정치를 낳고 정치는 습성을 번식시킨다. 역사가 남긴 교훈이다. 우리 세대는 어떤 역사를 남길 것인가.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