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 프랑스 노트르담성당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문화재의 소실에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했고, 프랑스는 모금 캠페인을 통해 성당을 재건하겠다 밝혔다. 화재 다음 날 시민들이 낸 소액으로 모인 액수는 26억 원이었고, 거대 기업도 화재가 발생하자 신속히 모금액 전달을 약속했다. 한 기업의 기부 액수가 나오자 보란 듯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겠단 기업이, 그렇게 약속에 약속이 겹치며 기업들은 총 7억 유로(9000억 원)를 약속했다. 화재가 진화되고 남은 검은 재 밑에서 발견한 뜻밖의 연대와 희망이었다.
시민들은 찬사를 보냈다. 선한 개인의 힘을 모은다 해도 분명 이 금액은 쉽게 닿지 못할 액수였다. 힘을 가진 이들의 책임과 존재 가치를 알렸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간이 흘렀다. 까만 재가 덮인 성당은 더 이상 미디어를 채우지 않았고, 세상의 관심도 그만큼 식어갔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보수 공사는 시작되었는데 거액을 약속했던 기업의 태도는 처음처럼 재빠르지도 과감하지도 않다. 당장 송금할 것처럼 했던 약속은 그저 각자의 ‘착각’일 뿐, 공사의 진행 정도에 따라 기부금은 사후에 지급된다는 관행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를 탓할 수도 약속의 무게를 따질 수도 없다. 금액과 함께 ‘때’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책임을 요구할 수 없는 거액의 기부 약속. 기업은 말 하나로 긍정적 이미지의 홍보효과를 얻지만, 약속 이행 시점도 방법도 명시하지 않았기에 ‘미루고 미룰 수 있는 책임’이 되었다. 얄밉긴 하지만 나쁘다 할 수 없으니 기업의 영리한 마케팅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문서화되지 않은 기업의 ‘약속’은 이렇게 쉽게 다루어져도 되는 것일까.
국내 중견 게임 기업은 네오위즈는 ‘체험형 인턴’이 아닌 ‘채용 전환형 인턴’으로 청년을 채용했지만, 본사에 배치된 청년은 단 한 명의 정규직 전환 없이 모두 해고되었다. 최초 모집공고에서 ‘심사 후 정규직 전환’이란 문구를 통해 가능성을 약속했지만, 회사 사정 때문에 채용이 어렵다는 이유와 전환 가능성을 100%라 명시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채용 전환형 인턴’이란 약속의 책임을 회피한다. 청년의 희망을 이용했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단 기대는 이용했지만 ‘조금 더 열심히 한 노동’에 대한 비용은 지불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토대로 발동된 열정이지만 그 확률을 100%라 명시하지 않았단 이유로 이렇게 청년을 착취하는 구조는 보다 큰 기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016, 2017년에 입사한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이제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내용은 ‘직장 내 괴롭힘’ 문제다. 계약직으로 아나운서를 뽑았지만, 보수도 직무도 정규직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식 업무도, 사내 전산망도, 업무를 하는 컴퓨터도 받지 못했다. 입사 당시엔 ‘계약직’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업무에 충실 하라고 했지만, 지금 계약서에 구애받는 쪽은 기업이란 조직과 정규직 자리에 있는 구성원이다. 쟁점은 계약에 대한 ‘갱신 기대권’이다. 계약직이라고 하더라도 계약 갱신에 대한 기대가 형성된다면 계약만료로 인한 해지 또한 부당하다는 법적 근거이다. 누군가는 이 기대를 ‘떼를 쓰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선배 아나운서가 타이르듯 말한 ‘얘들아’라는 호칭은 그들에게서 ‘아나운서’를 지우려던 회사의 뜻이 완성되는 것 같아, 후배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아나운서’란 직책이 사라지는 것 같아 무척 슬펐을 따름이다. 당하며 배웠고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청년들은 말로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작은 것 하나까지 문서로 명시하고자 한다. 근로계약서를 요구하고, 내 노동에 보장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노동의 금액은 얼마인지 확인한다. 약속된 사항이 아니면 이행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약속된 만큼 기대하겠다 다짐한다. 기대된 딱 그만큼만 몰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현명한 저항을 계산적이라 평하진 말자. 무릇 ‘계산적’이라 함은 약속된 것이 아닌 걸 요구하고, 책임지지 않을 것을 교묘히 말하며, 그렇게 청년의 희생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청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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