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0코스를 걸었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작품과 같은 길이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섯알오름, 송악산 산책로를 지난 뒤 산방산을 바라보며 사계 해안산책로에 이르는 구간. 올레길 코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구간이다.

출발은 다크투어리즘. 일제가 남긴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 6·25전쟁 중 양민 학살 현장인 섯알오름으로 가는 길이다. 알뜨르는 ‘마을 아래 있는 너른 벌판’이란 뜻인데, 일제는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군용 비행장을 만들었다. 당시 전투기 격납고 중 19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어 만나는 섯알오름에서는 1950년 8월 예비검속 명분으로 주민이 집단으로 학살됐다. 섯알오름의 움푹 팬 거대한 구덩이 두 곳은 그 현장이다. ‘서로 다른 132명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은 모두 한 자손’이란 의미에서 ‘백조일손’으로 불린다. 섯알오름에서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는 그래서 슬프도록 아름답다.

길은 송악산으로 이어진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활짝 핀 야생화와 해송들이 늘어선 그 옆으로 송악산 산책길이 나 있다. 해안 절경의 연속이다. 사계포구 쪽으로 가는 길. 해안선을 따라가면 2003년 사람과 개, 사슴, 새 등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이 나온다. 사방이 절벽을 이룬 산방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앞에 서 있다.

제주 방언인 올레는 ‘좁은 골목’이란 뜻이다. 2011년 여름에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 시즌2-‘올레길 그 여자’의 대사에도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자기 집에서 마을로 통하는 좁고 기다란 길이랍니다. (중략) 길이 끝나지 않는 한 사랑도 끝나지 않습니다.”

TV 드라마로 제작됐을 만큼 제주 올레길은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700리 갈맷길은 어떨까. 길의 풍광으로 따져도 제주 올레길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바다와 산, 강에 온천까지 어우러진 ‘사포지향’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포지향의 매력은 부산에만 있다. 갈맷길은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갈맷길의 전국적인 인지도는 아직 낮다. 부산시가 10년 전 6월 7일 해운대 동백섬 광장에서 ‘걷고 싶은 도시 부산 만들기’를 선포하면서 만든 갈맷길은 아직 배가 고프다. 갈 길이 멀다.

㈔한국의 길과 문화의 윤문기 사무처장이 주요 걷기여행길의 인지도(이용률)를 조사해봤다. 지난해 10월 2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카카오 키워드 PC 부문 검색 수에서 갈맷길(876)은 제주 올레(6725), 지리산 둘레길(6319), 북한산 둘레길(3755), 서울 둘레길(3179), 해파랑길(2700회)에 이어 여섯 번째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인지도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제주와 지리산을 빼면 수도권의 길이 2개인데, 수도권 인구는 무려 2500만 명이다. 갈맷길에 충분한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갈맷길은 비상할 준비가 돼 있는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길의 관리·운영 분야를 따져 보자. 운영·관리가 잘되는 길은 전문 민간단체가 위탁·관리하고 있다. ㈔제주올레가 그런 경우다. 걷기여행길의 특성상 행정기관이 직접 관리·운영하는 방식으로는 효율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갈맷길은 부산시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일선 구·군이 지역 내 갈맷길의 유지·보수 등 실질적인 관리·운영을 맡고 있으나 일선 구·군은 갈맷길 전담 조직이 아니다. 효율적으로 갈맷길을 관리·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부산시의 갈맷길 관련 부서(걷기좋은부산추진단)에도 전담 인력은 사실상 한 명이다. 갈맷길 관련 민간단체 ㈔걷고싶은부산은 ‘그린워킹’ 등 갈맷길의 프로그램 운영에 초점이 맞춰진 까닭에 갈맷길의 관리·운영 주체가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보인증대의 스탬프가 제대로 찍히지 않거나, 도보인증대를 찾기 어렵다는 걷기여행자들의 볼멘소리가 속출하고 있다. 갈맷길을 역방향으로 걸을 때 이정표를 찾기 어려운 사례도 많다.

부산의 걷기여행길에 갈맷길 외에도 해파랑길, 남파랑길 등이 뒤섞인 점도 도보 여행자에게 혼선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갈맷길인지, 해파랑길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부산관광공사에서 여행상품으로 내놓은 해파랑길, 남파랑길이 갈맷길과 중복된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마케팅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다만, 오는 10월 갈맷길 일원에서 펼쳐지는 걷기 여행 축제 ‘2019 아시아 트레일즈 콘퍼런스(ATC) 부산’은 절호의 기회다. 이를 발판으로 ‘월드 트레일즈 콘퍼런스(WTC) 부산’까지 유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10년 전 출발점으로 돌아가 갈맷길을 잘 다듬고 가꿔서 전 세계의 도보 여행자들을 부산으로 초대하는 날을 기약해보자.

편집국 부국장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