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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밀면과 부산의 여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5-08 19:19:23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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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봄과 여름의 경계가 언제냐고 물으면 나는 유명 밀면집 앞을 보라고 한다. 인간의 습관이란 예민한 것이어서 때로는 계절의 미묘한 변화나 시계보다 정확하게 움직이곤 한다. 올해 첫 밀면을 먹기 시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밀면집 앞의 대기행렬은 길어진다. 그때부터가 부산의 여름이다.

밀면의 원조인 우암동 ‘내호냉면’의 밀면.
분단이 되기 전, 평양냉면은 겨울음식이었다. 육수의 핵심인 동치미 국물에 살얼음이 껴야 하는데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차가운 겨울 날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냉면의 면은 강한 압력으로 뽑는 압출면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수틀에 메밀 반죽을 넣고 힘센 장정 두어 명이 순식간에 눌러야 했다. 국수틀은 보통 가마솥 위에 설치되었다. 틀에서 가는 국수가 뽑아져 나오면 즉시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삶았다. 이 작업이 가능하려면 아궁이에 충분한 장작을 때 강한 화력이 필요했다. 한반도의 아궁이는 난방과 취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한여름에 무시로 아궁이를 지피는 건 고역이었다.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 바닥이 쩔쩔 끓는 아랫목에 앉아 이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면과 육수를 들이켜는 맛. 이 역설이야말로 평양냉면의 진정한 매력이고 관서지방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겨울나기 방식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탄생한 밀면은 서사의 출발부터가 평양냉면과 결이 다른 음식이다.

밀면의 서사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6만여 명의 함경도 주민이 배를 타고 부산에 닿았다. 함경도는 척박하고 험준한 산지와 동해의 북단인 차가운 바다로 이뤄졌다. 함경도에서는 구황작물인 메밀조차 농사 짓기가 쉽지 않았다. 거친 산을 개간해 감자와 옥수수를 심는 게 대부분이었다. 땅에 비해 바다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동해는 한류성 어종의 집산지였다. 그 덕분에 황태, 명란, 식해 등은 조선 시대부터 함경도의 특산물이었다. 평양냉면과 형태는 같았지만 메밀 대신 감자와 옥수수 전분으로 면을 뽑고 편육 대신 생선을 삭혀 만든 식해를 고명으로 얹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이를 ‘농마국수’라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정착한 농마국수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속초 아바이마을과 서울 오장동 등에 정착한 농마국수는 평양냉면과의 차이를 부각하며 가급적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발달했다. 그것이 지금의 함흥냉면이다. 하지만 부산에 정착한 농마국수는 전분 대신 밀가루를 선택한다. 농마국수의 흔적은 점점 옅어지고 부산 사람의 기호에 맞춰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했으니 그 결과가 오늘의 밀면이다.

나는 밀면을 거칠고 완성도가 낮은 음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피란민의 디아스포라의 흔적이라면 밀면은 부산에 뿌리내리기 위해 몸부림친 생존의 결과다. 그 지난한 세월을 알기에 오늘도 밀면집 앞의 긴 행렬에 기꺼이 동참한다. 자꾸 보니 정이 들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음식. 그게 바로 밀면이다.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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