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그것은 청춘시절 한 번 이상은 무조건 들이닥치는 쓰디쓴 쓰나미다. 이 놈은 마법과도 같아 성근 자아를 영글게 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달콤해지기까지 하니 묘하기 짝이 없다. ‘방황’이란 단어는 달라붙는 연령대의 조합에 따라 뉘앙스가 확 달라진다. ‘청춘’이란 단어와 나란히 서면 반짝반짝 빛나기 그지 없는데, ‘중년’이란 말에 붙으면 끈적거리기 시작한다. 위험경보가 울리는 듯 왠지 19금이 떠오르고 뭔가 위태위태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쓴 소주와 담배연기, 바바리 코트, 그리고 굿바이 키스…. 뭐 이딴 이미지와 함께 흔들리던 중년의 방황은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고 황혼의 굳건함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이 방황이란 녀석은 시대가 바뀌면서 그 수명을 한껏 늘려버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노인에게 달라붙기엔 어색한 단어였는데, 요즘은 ‘황혼’이란 말과도 찰떡처럼 사이가 좋다. 조합이 생각보다 잘 어울려 청춘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멋들어진 느낌마저 준다.
갑자기 웬 방황타령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다. 딱히 마땅한 답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소설가 길남 씨가 현재 방황을 하고 있기 때문이랄까. 이제 청춘이라 부르기엔 삭아도 너무 삭아버린 별로 안 유명한 소설가의 방황이라. 아, 부끄러워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소설 따위 쓰는 중년이 흔들흔들 방황을 씹고 뜯고 맛보는 장면을 자기 손으로 이렇게 까발리고 있다니…. 그런데 비틀비틀 방황을 하다 보니 살짝 기분 나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중년의 방황임에도 불구하고 저 지긋지긋했던 청춘의 방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불확실, 다시 말하면 앞날이 캄캄한 것 빼고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망할 놈의 미래…. 이 놈은 어쩌면 저렇게 10대, 20대, 30대 때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까. 심지어 가운데 긴 손가락을 자립시키고는 날 향해 살살 흔들고 있는 것까지 똑같단 말이다.
방황하면 술이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기분이 나쁘다 못해 슬퍼지기까지 한다. 술도 몸이 따라줘야 먹지. 술 퍼먹고 어디서 자빠지고 몇 대 쥐어 박히고 와도 다음날 생생하던 10,20대의 육체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 40대 후반은 머리털 코털 할 것 없이 흰 것이 올라오고, 치아가 흔들리고, 감기 한 번에 한 달을 꼬박 고생하는 저질 체력이다.
그랬다. 중년의 방황하는 소설가는 이렇듯 우울과 슬픔을 줄줄이 달고 스크루지 영감의 친구 마레처럼 헤매고 있던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틀 연속 술을 마셨던 그날. 중년의 방황이 샛별처럼 빛을 발한 일이 있었으니.
새벽 2시에 친구 대신 대리운전에 전화하던 소설가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네, 반갑습니다. 고객님. 행선지가 어디십니까. 어제 모셨던 보수동으로 안내해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어제 후배의 대리운전도 불러줬던 기억이 난다. 소설가는 당황하지 않고 늠름히 대답했다.
“아니요. 오늘은 용호동 스카이 아파트로!” 너무 단호했던 것일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상담사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죄송합니다. 고객님. 웃으면 안 되는데. 제가 일을 어제 처음 시작해서요. 어쨌든 오늘은 용호동이란 말이죠. 큭큭! 아, 죄송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만만찮은 새벽의 대리운전 상담일일 것이다. 일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다. 새벽 2시, 피로가 몰려오는 데다 새 일은 익숙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다. 소설가의 의도치 않은 위트가 세상 어디서도 듣지 못한 환한 웃음으로 바뀌어 있다. 소설가는 덕지덕지 붙어 있던 우울과 슬픔이 모조리 녹아버리는 것을 느낀다. 내가 그녀로 인해 힘을 얻었듯 웃음으로 그녀도 힘을 얻었기를. “괜찮아요. 웃음소리가 너무 밝고 좋아요. 힘내시고요. 감사합니다.”
소설가는 중년의 방황에서 드디어 좋은 점을 찾아냈다. 아무리 비틀거려도 한 방에 똑바로 설 수 있음을. 미래가 캄캄하더라도 현재의 소중함을 불씨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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