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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어쩐지 낯설지 않은 브렉시트 결정장애 /강필희

대안 없는 반대 영국의회, 싸움·휴업 반복 우리국회

관용과 자제 없는 닮은꼴…민주주의 취약성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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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메이 영국 총리가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러 갔다가 ‘문전 박대’를 당하는 장면이 외신을 탔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시한 연장을 요청하기 위해 베를린에 갔지만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메이가 메르켈의 관저 앞에서 쭈뼛대다 들어가는 모습을 취재진과 경비 인력들이 멀뚱히 지켜봤다. 영국 언론이 “국가적 수모”라며 쌍지팡이를 들고 나올 만도 한데 ‘쿨하게’ 넘어갔다. “자초한 망신”이라는 분위기다.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은 지금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점철되는 의회의 행태를 두고는 “민주주의 발전에 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영국 하원이 지난 1월 15일부터 최근까지 브렉시트 합의안과 관련해 실시한 표결은 핵심적인 것만 다섯 번이다.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것까지 합하면 열 번이 넘는다. 이 표결 과정은 무책임 무소신 무능력의 표본으로 정치학도들의 사례 연구감이 될 만하다.

EU 탈퇴 시기와 조건 등을 맞춘 합의안이 부결되고 다른 대안을 찾자는 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조건없이 브렉시트를 곧장 시행하자는 안부터 아예 취소하자는 안,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하자는 안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이 표결에 붙여졌지만 어느 것도 과반이 되지 못 했다. 확실히 확인된 건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강경파든 온건파든 모두 반대는 한다는 것이다. 더 확실한 건 어느 쪽도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그렉시트(regrexit, 브렉시트를 후회한다)’ ‘브렉소더스(brexodus, 영국을 떠나자)’ ‘테렉시트(therexit, 메이를 쫓아내자)’…. 국가 운명을 가를 사안이 희화화 대상이 돼버렸다.
영국 의회의 이런 결정장애가 적어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다. 국회에 계류 중인 선거제 개혁 논의과정만 봐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과거 당론으로 채택한 적이 있으면서도 실제 논의가 시작되자 확실한 의견을 내놓지 않아 야당의 공격을 받았다. 이해찬 대표는 한때 연동형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차일피일 미루다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비례대표는 폐지하자고 어깃장을 놨다. 이마저 각 당의 이해관계가 뒤섞여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가운데 “입법 쿠데타” “토착 왜구”라는 원색적인 공방만 벌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은 여당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검경 수사권 조정, 유치원 3법 등 어느 것 하나 한 뼘 진전이 없다. 그 와중에 ‘빈손 국회’ ‘개점 휴업 국회’는 일상화되고 있다.

엊그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낙태죄만 해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 누구도 법 개정에 앞장서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헌재 재판관 9명 중 7명이 위헌 의견을 냈을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조항인데도 보수층과 종교계 반발을 우려한 국회의원들이 주저하는 것이다. 사실 헌재의 위헌이나 헌법불합치 결정은 입법부의 직무유기에 대한 심판에 다름 아니다.

하버드대 정치학교수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트럼프 당선에 충격을 받아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 독립된 사법부, 언론의 자유를 필요로 하지만 이를 제대로 운용하려면 법이 아닌 관용과 자제가 필수라고 꼽았다. 한 정당이 상대 정당을 타파해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고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설사 법과 제도로 보장된 권리일지라도 자당 이익에만 쓰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규범이라는 것이다. ‘힘은 있어도 휘두르지 않는다’는 규범이 퇴조되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트럼프 같은 이가 나타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극단주의자들의 득세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안 없이 반대만 하는 영국 의회 내 각 정파의 행태가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정권이 바뀌고 공수가 교체되면 비난을 퍼붓는 대상만 바뀔 뿐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면서 혐오와 증오의 동심원을 키워나가는 우리 정치가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영국에서 의회가 성립된 해는 1265년이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를 발명한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의회가 결정장애에 빠졌다”는 자조가 만연하고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비명이 나오고 있다. 알고 보니 그만큼 민주주의가 생각보다 취약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진보와 보수, 보수와 진보 정권의 교체가 막 자리잡기 시작한 나라에서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벼랑끝 정쟁은 정치인들이 용감해서인가, 무지해서인가.

논설위원 flut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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