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나오는 글이다. “(676년) 겨울 11월에 사찬 벼슬의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했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 끝에 이겨 4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는 이른바 ‘나당(羅唐)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삼국통일 직후 연합군에서 침략군으로 돌변해 신라까지 넘보던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결정적 전투였던 것이다.

구한말 단재 신채호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삼국통일을 혹평했다.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없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역사의 죄인”이라 규정했다(독사신론, 1908). 그럼에도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그리고 명장 김유신은 후세에겐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 당나라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만약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패했다면 한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말 자유한국당 안팎에선 ‘나황(羅黃)연합군’ 시나리오가 회자됐다. 당시 비박 복당파 김성태 원내대표와 그가 주도해 만든 비상대책위원회가 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당내 최대 세력 친박계가 당권 회복을 위해 은밀히 준비 중인 플랜으로 알려졌다. 플랜은 이랬다. 먼저 탄핵 국면에 당에 남은 중도파 나경원(羅卿瑗) 의원을 대거 밀어 일단 원내 리더십에서 비박계 입김을 제거한다. 여세를 몰아 전대에서 차기 대선주자 중 선두권을 달리던 황교안(黃敎安) 전 총리를 밀어 당권까지 되찾아 온다.

놀랍게도 나황연합군 시나리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현실이 됐다. 나 의원은 비박계 후보를 더블스코어 차이로 누르고 보수정당 최초 여성 원내대표라는 ‘신데렐라’가 됐다. 황 전 총리 역시 5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정치입문 불과 40여 일 만에 제1야당 대표가 됐다. 물론 이 시나리오 실현을 위한 나, 황 두 사람의 정치적 연대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친박계 의원들도 나, 황 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 2월 전당대회를 강타한 ‘태극기부대의 회오리’는 나황연합군 시나리오와 일맥상통했다. 탄핵 찬성파들에 대한 응징, 박근혜 사면, 중도외연 확장보다는 강성 우파 정체성 확립. 당심의 저류에 흐르는 급진 우경화에 나, 황 두 사람 또한 편승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문제는 선거가 끝난 뒤 두 사람의 정치행보다. 급속한 당의 오른편 쏠림에 나름의 균형추 노릇을 하기 보다 오히려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황 대표의 취임 1호 인사는 ‘원조친박’ 한선교 의원의 당 사무총장 임명이었다. 비서실장을 비롯해 주요 당직에도 친박계 인사가 대거 기용됐다. 최고위 회의에서조차 탕평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묵살됐다. 5·18 망언 의원 징계 또한 하세월이다. 당 윤리위원장의 공석을 빌미로 시간벌기에 나선 황 대표는 이젠 4·3보궐선거 이후로 미뤘다.

그간 4선의 의정활동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평가받던 나 원내대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 외신을 인용한 표현이긴 하나, 여당과의 대화 창구인 야당 원내대표가 말하긴 부적절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이틀 뒤에는 더 강한 발언을 토해냈다. “해방 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 정작 다른 정당은 일제히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라며 나 대표의 역사의식에 맹공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급격한 우회전 행보에 나황연합군 시나리오의 저작자(?)들인 당내 강경 우파세력은 만족감을 나타낸다. 반면 자기반성에 기초한 보수혁신으로 중도외연 확장을 주장해온 비주류들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판에서도 오랫동안 회자돼온 격언이다. 선거전략과 모름지기 수권전략은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나당연합군과 나황연합군은 닮은꼴일까, 아니면 반대꼴일까. 필자만의 관심은 아닐 것이다.

부산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