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떠오르는 구절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부활을 이끌어낸 첼로 거장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그는 90이 넘은 고령에도 하루에 6시간 이상 연습에 몰두했다. 95세가 되던 해 그 이유를 물었다. “지금도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것 같아!(I'm beginning to notice some improvement).” ‘Beginning to notice’는 어린 새싹이 땅을 딛고 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경이로운 장면이다. 카잘스는 매일매일을 새봄처럼 살았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미국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Theodore Roethke)의 말이 영화 ‘은교’로 유행했었다.

노화는 죽음의 전 단계이고 젊음과 늙음이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의 산물이다. 그러나 세포와 동물실험 결과에 의하면 노화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잘살기 위한 전략이며, 노화세포는 일정한 조건만 갖춰지면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은퇴 후에도 가을이면 전국의 산과 들판을 누비면서 온갖 꽃씨를 모으고 봄에 싹을 틔워 모종을 나눠주는 친구가 있다. 어느 봄날 산길에서 발이 꼬여 넘어질 뻔 했던 그가 기막힌 감탄사를 뱉어낸다. “하마터면 할미꽃 대궁을 부러뜨릴 뻔 했네!” 수채화를 그리고 기타를 치며 서투르지만 시도 쓰는 친구,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술값을 계산해버리는 그 친구의 삶은 감동과 재미, 그리고 의미 그 자체다. 이런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좋음(goods)’이다.

연꽃이 만발한 논길에서 여든쯤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다. 할아버지가 몸을 수그려 연꽃을 찍을라치면 할머니가 허리를 붙잡아 준다.

이 장면보다 더 뒷골 땅기는 사진은 없을 것 같다. 꽃들에게 말을 걸고 바다를 열정의 빨강, 하늘에 행복의 분홍을 칠하는 마티스가 되어 호기심과 배움에 자신을 맡겨보자. 나이 들어 진실로 슬픈 게 있다면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 뛰는 일이 드물어지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날 사무실 뒷산에서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날아올랐다. 얼떨결에 동영상으로 담았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초라한 행장을 하고 주황빛 구름 덮인 파미르고원을 넘는 수도승 혜초의 모습이 벼락같이 엄습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후로는 바람에 날리는‘검은 비닐봉지’만 보면 동영상을 찍는다.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비닐봉지를 보고 “난 이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라는 대사가 나오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영화는 뒤에 알았다. 아무튼 10여 년 정도 긴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하면 ‘검은 비닐봉지 동영상 전문가’라고 불러주는 곳이 생길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다 30년 정도 하면 일가견(一家見)의 경지에 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세 때처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95세 어른의 회한(悔恨)이다.

지난겨울, 텅 빈 나뭇가지에서 과연 꽃이 다시 필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라는 서울 어느 빌딩에 붙어 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나는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는 성찰 앞에서 서성거렸다. 겨울이 품고 있는 봄을 믿기 때문이다. 하여, 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우리의 가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새싹이 움트고 있음을 단정하면서 새봄을 시작하기로 했다.

분명 나이와는 상관없이 늘 또 다른 내일이 오고 ‘Beginning to notice’의 경이로움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장